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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태국왕실 전속 악단장 강철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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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방콕=전육 특파원】강씨가 태국왕실 전속 악단 장으로 자리를 굳히자「방콕」의 외교사절들은 각기 그들의 「파티」에 강씨의 악단을 유치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되었다.
강씨는 1회 출장에 3백50「달러」의「개런티」를 받지 않으면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
「부미볼」국왕은 이따금 자신이 작곡한 신곡의 취입이나 편곡을 강씨에게 부탁해 온다. 왕이 작곡한 곡은 왕의 허가가 없으면 절대 상품화하지 않는 것이 태국의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부미볼」왕은 강씨가 소속한「스리·크룽」사가 취입한다면 별다른 반대 없이 상품화를 허용해 준다고 한다.

<태국대중가요 착 곡엔 실패>
왕비의「누드」그림을 그렸다가 이것이 세계「매스컴」에 공개되는 바람에 일약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부미블」왕은 왕의 근엄성보다는 예술가의 자질이 앞서는 사람으로써 예술을 통해 맺은 교우관계는 퍽 존중하는 편이다. 그래서 강씨의 음악을 좋아하는 왕은 강씨의 신곡만 나오면「레코드」회사에 연락해서 가져갈 정도다.
태국고전음악의 현대화에 자신을 얻은 강씨는 이어 대중가요와 경음악의 작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중가요의 작곡은 태국언어의 특이성 때문에 좀 체로 성공을 거두기가 힘들었다.
그가 작곡한 곡을 작사자에게 보내 가사를 붙여 놓고 가수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면 작곡가의 의도와는 다른 엉뚱한 곡이 되고 만다. 그것은 음부와 가사의 일치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태국의 언어를「마스터」하기 전에는 대중가요의 작곡이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작곡활동은 영화음악에만 국한시키기로 했다. 영화음악은 가사가 필요 없고 「테마」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되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작곡해 낼 수 있었다. 다만 주제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촬영현장을 지켜봐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음악의 작곡은 무시할 수 없는 강씨의 수입원이다. 1편「개런티」는 악단 동원 비까지 합쳐 3천「달러」.
강씨의 작품은 잠깐 불리다 사라지는 유행가와는 달리 인기가 지속적인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1년 열두 달 내내「방콕」의「레코드」판매점에는 그의「디스크」가 진열되어 있다.
인기는 인기를 몰고 왔다. 드디어「방콕」의 TV에서도 강씨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태국 유일의「칼라」TV 방송은 신인가수「콘테스트」「프로그램」인『행운의 문』이란「프로」에 강씨의 악단을 고정 출연 시켰다.

<위장병 악화돼 죽을 고비도>
이렇듯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 듯이 풀려 그는 고국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명성과 생활의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요즘도 처음「방콕」에 도착했을 때 가난·명마와 싸우던 기억들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67년 말「방콕」주변의 미군부대를 찾아다니며 4인조 악단을 이끌고 떠돌이 공연을 할 때의 일이다. 미군부대에서 제공하는 허술한 막사에서 기식을 했는데 48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 위장병이 악화, 그는「크리스마스」와 망년회 공연을 포기하고 2백km나 떨어진「방콕」에「택시」를 타고 되돌아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사관에 근무하던 고향친구의 도움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의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것이란다.
병원 측은 4.5cm 위궤양이라며 강씨에게 개복수술을 권했다. 순간 그는 결심했다. 돈도 없고 병세가 그 정도라면 죽을지도 모르니 수술을 받으려면 고국에 돌아가서 받겠다고 버텼다. 결국 그는 입원한지 8일만에 내복약만을 받아 퇴윈 했다. 이때부터 아무리 날씨가 덥고 목이 말라도「코카·콜라」한잔 안 마시는 극기의 생활을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은 것도 물론이었다.
생활이 안정된 69년 그는 부인과 두 아들을「방콕」으로 데려왔다.「방콕」시내의「맨션·아파트」에 거처를 정하고 아이들은 외국인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러나 강씨는 아이들이 커 감에 따라 또 한가지의 심각한 고민에 부닥쳤다.
자녀 교육문제가 그것이다. 지금 고1·중1인 아이들은 어느새 국적을 잃은 아이들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아들을 하루 속히 고국에 데려다 공부시킬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작년 가을엔 일부러 서울을 다녀왔다.
게으르고 퇴폐적이며 따스한 인정미를 찾아 볼 수 없는 태국인들 틈에서 악단 일을 맡아 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한국인의 기질을 잃어 가고 있는 자식들이 가엾다는 것이다. 그가 가끔 귀국할 때 교우·동창들과 나누는 환대와 인정의 교신을 자식들은 영원히 모르고 말 것이 아닌가 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태 사회 환대로 귀국 망설여>
하루 빨리 두 아들을 한국에 들여보내 되도록 이면 중등과정부터 동족사회 속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병역의무도 치르게 하고 싶다는 것이 강씨의 교육관이다.
강씨 자신이 지금 귀국할 수 없는 것은 이곳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비중을 고국에서 당장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과 또『외국유학을 한 태국의 음악가들도 못해 낸 일들을 해낸 태국음악계의 은인』(「부미볼」국왕 말)이라는 태국사회의 환대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철없는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조급함이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한다.
강씨가 연주활동 중 가장 애를 먹는 것은 태국 민의 민족성 때문. 더운 나라 사람들의 특징은 게으름이다.『연습을 열심히 하라, 시간을 엄수하라』는 등의 말을 할 때마다 단원들은 한결같이『이만하면 됐는데 왜 못살게 볶느냐』는 눈치다.
조금만 심한 말을 해도 달려들거나 말도 없이 그만둬 버리는 단원들의 타성과「자꾸 향상하려는」강씨의 노력이 매일매일 팽팽한 대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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