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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도 엄마 역할도 원칙에 충실해야 성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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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가 뭔말인지도 모르던 1980년대, 전공인 불어(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는 물론 영어까지 능통한 이 아가씨는 한국이 비좁게만 느껴졌다. 무작정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손편지를 쓰고 또 썼다. 나를 써달라고. 그랬더니 6개월쯤 뒤. 자리가 났으니 한번 와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IOC 생활을 발판으로 미 경영대학원(MBA)를 거쳐 미국 호텔업계 등에서 일했다. 스위스에서나 미국에서나 늘 한국식으로 악착같이 일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도맡아하는 모습에 동료들이 “혹시 간첩 아니냐”고 수근거릴 정도였다. 그런가하면 한국에 돌아와 사업할 땐 술자리 접대같은 전근대적 영업방식 없이도 회사를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키워 ‘기적’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 싱글이 아니라 워킹맘이다. 일터에서의 이런 억척스러움이 엄마 노릇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50) 대표 얘기다. 보수적인 교사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나이 서른 셋이던 96년에 귀국하자마자 결혼했다. 결혼했다고 그 진취적인 성격이 어딜 가나. 전업주부로 살 사람이 아니었다.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에 5급 교육행정사무관으로 특채돼 이번엔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첫째 아들을, 그리고 2년 뒤 둘째 아들을 낳았다. 삼성물산에 다니던 남편은 당시로선 드물게 가사 분담을 제법 하는 신(新)남성이었다. 그런데 유독 걸레질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통 워킹맘 같으면 전투 모드에 돌입하거나 팔자려니 하겠지만, 한 대표는 쪼그려 앉지 않아도 깨끗하게 청소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가 99년 11월 한경희생활과학 설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한집에 살며 두 돌 된 첫째와 9개월 된 둘째를 돌봐주던 상황.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워킹맘에 비해 좀더 마음 편히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긴 했지만 다른 워킹맘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고된 시기였다. 그런데 출퇴근 시간이 확실한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무슨 배짱으로 사업을 벌인 걸까. 그때의 판단이 단순한 객기가 아니었다는 건 2003년 공전의 히트상품 한경희 스팀청소기 출시로 이미 증명해보였다. 한경희생활과학은 지난해 매출 1500억원을 올리는 탄탄한 가전 제조업체로 자리를 잡았다. 어린 두 아들을 둔 워킹맘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 그리고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살기가 어떠한지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00년 영찬군 돌 사진. 시부모님을 비롯해 온 가족이 함께 찍은 몇 안돼는 사진이다. 시어머니·영찬·남편(고남석 카페이탈리아 코리아 대표)·영철·시아버지·한 대표(왼쪽부터).

-양가 어머니가 자녀를 키워줬다. 만약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전업주부가 돼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 전업주부라고 생각한다.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니 난 행운아다. 하지만 만약 두 분이 육아를 도와주지 않았어도 사회생활은 했을 거다. 전업주부로서의 삶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난 항상 사회적 성취가 중요했다.”

-한창 애들이 엄마 손을 많이 탈 때 사업을 시작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당시만 해도 남성 전유물이던 제조업에 뛰어들었으니 쉬운 게 없었다. 녹초가 돼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엄마 일이 시작됐다. 두 아이가 다 잠들면 전기전자공학 공부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다. 퇴근 후 약속 잡지 않기, 그리고 주말엔 온전히 엄마 노릇하기다. 당시 업계에서는 한경희 제품은 알아도 한경희 얼굴 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 였다. 매일 밤 애들 머리 맡에서 책을 읽어줬다. 애들한테 쓸데없는 죄책감 느끼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한 거다.”

-애들이 학교 들어가면 엄마의 정보력이 중요하다던데.

“맞다. 첫째가 지난해 미국 유학을 갔지만 중학교까지 강남에서 다녔기 때문에 엄마 정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인터넷 정보도 중요하지만 귀동냥 만한 게 없더라. 그런데 워킹맘은 정보 얻기가 정말 어렵다. 학기초가 되면 만사 제치고 학교 모임이나 학부모 총회에 참석한다. 학기초에 시간을 투자해야 엄마들 연락처라도 얻을 수 있으니까. 혹시 학급 모임에 못 나가면 따로 자리를 만들어 엄마들을 만난다.”

-잘 나가는 여성 최고경영자(CEO)라 여기저기 찾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럴 시간이 있나.

“엄마들 모임이 주로 낮이라 대부분의 워킹맘은 참석하기 쉽지 않다. 난 주말이나 저녁시간을 이용했다. 잠깐이라도 만나 커피 한잔 사는 거다. 엄마들이 돌아가며 해야 하는 학교 행사 등도 꼭 참여했다. 미룰 수 없는 업무 때문에 빠지게 되면 순번을 바꿔서라도 내 할당량은 꼭 채웠다.”

한경희 대표 가족의 추억을 담은 만화일기. 왼쪽 그림은 한 대표 4식구가 등장하는 만화일기 표지. 이 안에는 한 대표가 워킹맘으로써 가슴 찡하게 느꼈던 에피소드가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하
루는 둘째 아들 영찬이가 “그거 있잖아,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나오는 거” 이렇게 말하더란다. 알고 보니 눈물을 설명한 거였다.

-불문과 출신 엄마와 아랍어과 출신 아빠라니. 애들한테 언어 교육은 확실히 시켰을 것 같다.

“아니다. 지금은 국어·영어 등 다 잘하지만 둘째는 말이 늦게 트여서 5살 때 구강외과에 가봤을 정도다. 남편과 내가 애들 초등학교 6학년까지 매일 밤 책 읽어준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소설책이나 영어 동화책은 물론 만화책까지 애들이 원하는 책은 다 읽어줬다. 따로 공부를 시키진 않았다. 아, 딱 한번 있다. 첫째가 사립 유치원에 막 들어갔을 때다. 유치원의 영어 공개수업에 갔더니 우리 애만 영어를 못 알아듣고 울상을 짓고 있더라. 그것도 충격이었는데 그 다음이 더 큰 충격이었다. 원장 선생님이 부르더니 애가 공부에 소질이 없는 듯하니 공부 포기하고 공고나 보내는 게 좋겠다는 거다. 유치원생, 게다가 모국어도 아닌 다른 나라 말을 좀 못한다는 이유로 이런 얘기를 함부로 하다니. 오기가 발동했다. 알파벳부터 직접 가르쳤다. 그리고 딱 한 달 뒤.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떻게 했기에 애가 한 달 만에 유치원에서 제일 영어 잘하는 아이가 됐느냐고 말이다. 우리 애가 모자란 게 아니란 걸 증명하자마자 그 유치원을 관뒀다.”

-아직도 직접 가르치나.

“중학교만 올라가도 직접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은 없다. 대신 시간 관리법은 가르쳤다. 매일 계획표를 세워 스스로 공부한다. 이게 공부를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시간 관리법이라고 하면 거창한 걸로 오해하기 쉬운데 그날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적고 중요도에 따라 순번을 정하는 거다.”

-영어와 중국어·프랑스어·이태리어까지 하는 걸로 안다. 그래도 비법이 있을텐데.

“외국어 익히는 노하우는 있다. 단어를 따로 외우지 않는다. 대신 문장을 매일 크게 소리내 여러 번 읽는다. 책 한 권을 최소 5번씩은 읽는다. 문법부터 공부하는 것 보다 내 입에 익을 정도로 읽고 또 읽는 게 효과적이다. 애들한테 내가 하는 식으로 따라하라고 시킨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줘서인지 애들도 소리내 읽는다.”

한경희 대표의 첫째 아들 고영철군(오른쪽)과 둘째 영찬군.

-힘들게 일하며 그렇게 정성을 쏟았으니 애들과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다.

“아니다. 둘째가 중학교 2학년 올라가더니 반항을 좀 하더라. 괜히 사람들 앞에서 엄마한테 말 함부로 하고 청개구리처럼 굴었다. 몇 번 주의를 줬는데도 계속 그러더라. 고민 끝에 매를 들었다. 그러면서 왜 매를 드는지 내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애가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인정하더라. 사춘기 때는 그런 거 같다. 스스로도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멈출 수 없다. 그때 브레이크를 거는 게 부모 역할이다. 참, 매를 든 후 화해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둘째랑도 지금 살갑게 지낸다.”

-아이와의 유대관계가 끈끈했나보다.

“그렇다. 부모가 아이를 믿고 있는지를 아이 스스로 느껴야 훈육이 가능하다. 난 애들 어릴 때 주말만 되면 전시장이나 학습체험관 등 온갖 데를 다 찾아다녔다. 힘들지만 주말에라도 애들이 특별한 추억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몸이 부서져라 놀아줬는데 나중에 괜한 짓이었다고 깨달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물었더니 두 아이 다 온 가족이 한강에서 자전거 탄 걸 꼽더라. 특별한 이벤트를 해주기보다 애들이 좋아하는 걸 꾸준히 같이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그 극성스러운 주말 나들이를 멈췄다. 대신 땀 흘리며 같이 논다. 그러니 할 얘기도 많고 애들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더라.”

-회사 얘기 좀 하자. 스스로 여성친화기업이라고 생각하나.

“직원의 26%가 여자다. 연구원이나 마케팅이냐 등 분야별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발과정에서 남녀 차등을 두지 않는다. 여직원의 육아와 출산휴직에 대한 부담을 없애려는 노력도 많이 한다. 최대 15개월까지 휴직할 수 있는데 눈치 안보고 휴가갈 수 있게 대체 인력을 뽑았다. 공무원 시절 출산휴가가 딱 2개월이었다. 턱없이 부족했다. 후배 엄마들이 좀더 자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나부터 먼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다. 보통 기업에서는 직원 평가할 때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직원에게 가장 낮은 점수를 주는 경우가 많다. 관리자는 그런 유혹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출산 후 복귀한 직원은 무조건 평균 점수를 주도록 제도화했다. 애 낳는 게 죄짓는 것 같은 분위기, 우리 회사에서만이라도 없앴으면 한다. 마이너스 점수는 그 해 일을 가장 덜 한 직원이 받아야지 출산한 직원이 받아선 안된다. 이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깔렸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글=김소엽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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