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빠 언제 올까, 엄마는 대문 안 잠그고 사셨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남북 이산가족 2차 상봉 첫날인 23일 북한 금강산 면회소에서 우리 측 최고령자인 이오순(96·오른쪽) 할머니가 북측의 남동생 조원제(83)씨를 만나고 있다. 이 할머니는 원래 성이 조씨였지만 어려서 아버지가 호적에 등록해주지 않아 시집갈 때 시댁에서 다른 사람 밑으로 호적을 등록해 이씨가 됐다. 가운데는 조씨의 남측 여동생 조도순씨. [사진공동취재단]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6·25전쟁 통에 가족과 헤어진 북한 김휘영(88)씨가 상봉장에 가져온 사진에는 ‘고향의 봄’ 가사가 적혀 있었다. 경북 영주가 고향인 김씨는 “항상 사진을 보며 고향 생각에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남에서 온 종규(80)씨 등 3명의 여동생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고, 오빠”라며 눈물을 흘렸다.

 북측 가족 88명의 신청에 따라 남측 가족 357명이 방북한 2차 이산가족 상봉이 23일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시작됐다. 동생들을 만난 북한의 최인규(82)씨는 “64년 만에 만났네, 64년 만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북한의 언니 김태운(79)씨와 만난 김사분(74)씨도 “죽은 줄 알고 호적도 정리했는데 이렇게 살아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쏟았다.

 6·25 때 북한 ‘의용군’이 되면서 연락이 끊긴 가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다. 임금영(86)씨는 자신 대신 의용군에 갔다 돌아오지 못한 동생 선영(83)씨의 손을 잡고 “그때 내가 21세였고 네가 18세였는데 벌써 이렇게 세월이 지났다”며 형을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61년 전 모내기를 하다 의용군으로 징집된 성하웅(82)씨도 동생을 만났다. 당시 4형제가 모두 징집됐지만 셋째인 성씨만 유일하게 연락이 끊어졌다. 동생인 하정씨는 “여태까지 살아줘서 너무 고맙다”며 형의 얼굴을 연신 어루만졌다. 전쟁 당시 북한군으로 끌려간 약혼자를 따라간 언니 홍석순(80)씨를 만난 홍명자(65)씨도 “무당에게 물어보니 언니가 죽었다고 해 가족들이 영혼 결혼까지 시켰다”며 눈물을 흘렸다.

 배재고 3학년 때 형과 함께 의용군이 된 주정환(83)씨도 조카 종택씨를 만났다. 주씨는 형님이자 종택씨의 아버지인 종국씨가 2003년 83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종택씨는 “(소식이 끊어졌던 아버지가) 평양에서 사셨다니 그래도 잘 사신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유일한 부녀 상봉자인 남궁봉자씨도 북쪽의 아버지 남궁렬(87)씨를 만났다. 6·25전쟁 당시 갓 돌을 지난 봉자씨가 아버지와 헤어진 지 60여 년 만이었다. 봉자씨는 눈물을 흘리며 “저 알아보시겠어요?”라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60대가 된 딸에게 “못 알아보겠어”라며 고개를 저었다. 봉자씨가 5년 전 별세한 어머니 소식을 전하자 남궁렬씨는 “꿈결에라도 한 번 간절히 만나봤으면…”이라며 울음을 삼켰다. 조카 남궁견씨는 “지난해 추석 때 고모(남궁렬씨 막내 여동생)도 휠체어를 타고 오려다 못 오고 바로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태평양을 건너온 고령의 해외 거주 가족들도 있었다.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꾼 미국 국적의 김경숙(81)씨는 6·25 당시 헤어진 오빠 전영의(84)씨를 만나 “엄마가 오빠 나가시고 대문을 안 잠그고 살았다”는 말을 전했다. 전씨는 “어머니! 내가 언제 올지 몰라 대문을 안 잠그고 살았다는 말이오”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개별 상봉에 이어 열린 만찬에선 60여 년 만의 가족식사가 이뤄졌다. 북의 오빠 류근철(81)씨를 만난 여동생 근배씨와 정희씨는 붉어진 눈시울로 메로구이와 잡채를 연신 먹여주고 근철씨 뺨에 뽀뽀를 하기도 했다. 여동생을 만난 박재선(80)씨는 “아까 상봉장에서 흘린 눈물이 부모님 묘소에 떨어져 금잔디 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북측 단장인 이충복 조선적십자회 부위원장은 만찬연찬에서 “대결과 분열의 골을 메워 통일의 봄을 앞당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측 상봉자인 최준규(78)씨가 “조국통일 만세”라고 만세삼창을 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 정원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