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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검은 대륙에 심는 기와 기(끝)-우간다의 김남석 사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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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국관리의 「유니폼」을 입은 한국인-얼핏 귀화했거나 영주권을 가졌을 거라 여기기 십상이지만 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어엿하게 한국여권을 가지고 현지관리와 외국인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골고루 누린다.
「우간다」권력의 핵심부를 말한다면 우선 군부를 들 수 있고 다음이 내무성산하의 형무 청. 검찰과 행형 업무 및 일부 경찰업무까지 관장하는 이 형무청에 김남석6단(42)이 고급관리로 재직 중이다. 「우간다」의 군·경찰·형무청을 통틀어 유일한 외국인이다.

<일반 보급 못해 안타까운 한때>
김씨의 직함은 『Uganda Prison Col-lege』, 즉 「우간다」형무관학교의 교수다. 직급상으로는 학교장 및 본 청의 국장급과 똑같은 「슈퍼인텐던트」. 하루에도 수십 차례 듣는「예스·서」라는 소리가 귀에 설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김씨의 일과는 형무관학교와 경찰학교를 오가며 각기 1시간씩 태권도를 지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69년부터 줄곧 똑같은 일이다. 좀 단조로운 생활이라 시간을 내서 일반에게 태권도를 보급하고 싶어도 「우간다」정부에서 허용하지 않아 안타까워할 뿐이다.
이런 제약 속에서 6년 동안 6천5백여명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들 모두가 형무관학교와 경찰학교의 학생이 아니면 군 특수부대요원들로 이중 15명을 유단자로 길러냈다.
「우간다」정부관리라는 제약, 일반보급이 허용되지 못하는 어려운 사정아래 김씨의 활동은 그늘로 처지게 마련이라 사회에 널리 알려질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의 끈질긴 집념과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은연중 그의 손길은 요로 요로까지 뻗어가고 있다.

<시찰 온 북괴외교관 질겁>
단적인 예가 73년4월에 열매를 맺은 「우간다」태권도협회의 조직이다. 「우간다」의 정치·사회정세에 비추어 이런 단체가 만들어지려면 「고위층」의 「자비심」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김씨가 「우간다」정부에서 어느 만큼 선임을 얻고 있는가 하는 사례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해 11월 구미언론 특히 영국계 「매스컴」들이 일제히 「이디·아민」대통령의 잔인성을 공격한 일이 있다. 이때 영국 「매스컴」들은 무고한 정치범 수천명이 감방에서 학대를 받아가며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상천외의 파격적인 일을 해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디·아민」대통령은 발끈,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각국 대사 등 외교관을 초청하여 형무소를 불쑥 찾았다.
이때 접대역을 맡은 인물이 김씨를 비롯한 학교장·형무소장 등이었다. 북괴 대사·중공대사 등도 동행한 이 시찰 때 「유니폼」을 입은 김씨에게 여러 사람의 이목이 집중될 것은 당연한 일. 동양인이 접대를 맡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대사를 비롯한 중공외교관들은 김씨에게 유달리 관심을 갖고 국적을 물어보는 등 호기심을 갖는 반면 북괴외교관들은 김씨가 곁에 가면 질겁하여 자리를 피했다.
「이디·아민」대통령이 지난해 8월 태권도 시범을 본 뒤 김씨를 한 계급 특진시킨 것이 파격적이었던 덕분에 직제상 그보다 상위에 있어야할 형무관학교장을 한 계급 낮게 내버려두어 한동안 혼란을 빚기도 했다. 결국 몇달 뒤 학교장도 진급이 되긴 했지만 김씨 덕분에 자신의 계급이 올랐다고 두고두고 고마워한다는 이야기다.
김씨가 69년 「우간다」정부의 요청을 받은 한국대사관의 주선으로 처음 「우간다」에 왔을 때는 형무관 중 10명만 선발하여 태권도를 가르치느라 그리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다음해부터 이들을 조교 삼아 학생들을 지도해오던 중 71년 정권이 뒤바뀔 때가 고통스러웠다고 김씨는 말한다.

<쿠데타 때는 귀국할 각오도>
「오보테」대통령 정권이 현 「아민」대통령의 「쿠데타」로 바뀌며 진행된 일대 숙청 극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고 회상한다. 그때의 불안도 불안이었지만 「아민」대통령이 인도·영국인에 대한 추방령을 내릴 때 역시 그들과 함께 알몸으로 쫓겨나지 않을까 몹시도 떨었다. 더우기 군부·경찰·형무관 등 이른바 Security Force에 외국인은 한사람도 용납 않는다고 모조리 해고할 때는 귀국준비를 서두르기도 했다.
다행히 김씨를 비롯한 한국인의사들은 「우간다」를 착취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도와주는 외국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왔기에 터럭 만한 피해도 없었다. 숱하게 많던 외국인관리들이 쫓겨나는 와중에서 김씨가 유일하게 그 자리에 눌러 앉을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김씨의 행동은 표면상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더욱 활기를 띠어 갔다. 표면에 나서려지 않는 인사들을 설득하여 태권도협회를 조직하는 한편 74년 서울의 태권도선수권대회에 「우간다」선수단을 이끌고 오는데 성공했다.
현재의 김씨로서는 이나마 성과가 자신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덕분이라고 자부한다. 미흡한 점이 있다면 자유스런 태권도 보급활동을 제한하고 있는 벽, 이 벽을 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다. <캄팔라=김동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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