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해방30년의 문제작·문제작가 대표집필 이상만 <음악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국악의 창작이 양악의 창작과 구별되어 문제작으로 선정해야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떤 의미로 보아서는 창작은 이러한 범주를 초월해서 다뤄져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였다.
해방30년의 역사가운데서 국악의 창작은 후반기의 작업에 속한다.
해방의 격동 속에서 민족음악 보존의 작업은 끈질기게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6·25사변으로 인해서 일시 중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악은 보존하는 컷이고 창작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초기에는 너무나 당연했던 일이다.
1948년 국립국악원이 창설되고 부터 국악육성에 관한 관심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속악과 아악의 대칭적인 관계는 창작이념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방직후 격동기에 있었던 혼란의 홍역을 치르지 않으면 안됐다.
국립국악원이 창설되고 국악창작의 기선을 잡은 것은 김기수씨(58년)의 송광복 과 개천부 였다. 송광복 은 순 아악식 편성의 관현 악기를 다룬 창작 곡으로서 전통적인 작품에만 의존해 왔던 국악「례퍼터리」의 개척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작품 그 자체는 양식이나 기법에 있어서 많은 여지를 남겨주게 하였다.
오히려 양악의 형식적인「패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58년 이혜구의 한국 음악연구가 출간되고 이 논문은 국악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56년 덕성여대에 국악과가 창설되어서 젋은 국악인 양성의 새로운 자극을 갖게 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폐 과되었다.
1959년 서울대학교에 국악과가 생기게 되고 이것이 터전이 되어 국악의 창작은 새로운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1961년 미국인 작곡가「루해리슨」은 무궁화 새 당락을 우리나라 체류 중에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순수한 우리악기를 사용하여 작곡한 것으로서 국악창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작품 그 자체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와 방향을 시사하여주었다. 그리고 미국의 작곡가「앨런·호바네스」는 그의 교향곡16번을 한국 체류 중 작곡하고 초연하였는데 가야금과 관현악의「콘체르토」형식으로 국악기와 양악기의 조화를 모색하였다. 전기 무궁화 새 당악은 서울대학교 국악과의 제1회 정기 연주회에서도 연주되었다. 국악과의 정기연주회는 국악창작의 새로운「메카」로서 등장하였는데 1961년11월18일 서울음대국악「홀」의 낙성기념으로 연주되었다.
1962년12윌 조선일보의 국악경연대회는 이수자의 합주곡 고궁의 인상을 최고우수상으로 시상하였다.
전기 서울음대의 정기연주회는 계속해서 신작국악 곡을 연주하였는데 김용진의 합주곡1번은 1962년7월에 발표된 것이다. 이 작품은 복고적인작품 경향으로서 국악의 전통적인 입장을 새로운 창작을 통해서도 견지하였다.
이성천의 대금독주를 위한 변주곡도 1962년의 작품이다.,한편 황병기는 가야금 연주기교의 확산과 새로운 「패턴」의 독주곡을 작곡하였는데 이것이 가야금 독주곡『숲』이다·1965년에는 전기연주회에서 조재선 의 대금협주곡이 발표되었다.
제4회 정기 연주회에서는 정회갑 의 가얏고 2중주, 제5회에서는 서우석의 『칩거』 등이 발표되었는데 양악작곡가들의 국악기를 위해서 작곡함으로써 국악창작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여 주었다.
1966년에는 김흥교가『관 현 타악기를 위한 2장』을 발표하였고 윤량석도『피리 가얏고 장고를 위한 삼중주』를 발표하였다.
1968년 12월16일에는 이 연주회가 서울대음대에서 국립극장으로 진출하면서 강석희의『예불』이 발표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전위적인 양식이 국악창작에 도입되어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것은 당시 새로이 대두되던 윤이상의 작곡양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국악의 창작은 서양의 고전이나 낭만적 양식과의 해후에서 새로운 현대적 양식과의 절충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국립 국악원은 신국악보를 발간, 새로운 국악창작의 진흥에 힘을 썼으며 여기서 김용진(62년)이성천(63년)김용만(67년) 합주곡, 김경숙(68년) 합주곡, 이해식 등이 입상 했으며 국립국악원의 자체연주회에서 이강덕·이상규(춘향전)등의 작품이 연구되어서 전통적인 기법 위에 창작이 신장되었다.
1967년 이성천은 최초의 국악 작품의 발표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가얏고 독주곡『숲속의 이야기』등이 발표되었다.
이성천의 독주곡이나 황병기의 작품 (석류 집) 은 가야금 연주에 있어서 새로운 기법을 학장 시키는데 공헌한 바가 많이 있다.
한편 민속음악부문에서는 성금연·김소희 등 민요중심의 창작 곡을 내놓았으며 박동진은 판소리의 연창으로서 판소리유형의 정립을 모색하여 직접적인 창작은 아니지만 판소리 진흥에 공헌하였다. 국악의 창작은 이제 서서히 새로운 창작음악으로서 세계적인 통로를 통해서 보다 발전해 가고 있다.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