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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의 내외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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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 동안의 경제 원리에 따른다면 인플레와 불경기는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나 이제는 오히려 인플레와 불황이 분명히 공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도리어 세계 경제의 기본적인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곧 세계 경제의 주류라 할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중대한 시련기를 맞아 그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느낌조차 주는 것이다.
전후 30년간을 지배해온 국제 협조 체제는 하나하나 그 기능을 상실해감으로써 세계 경제 질서의 붕괴 과정을 시사하고 있다. 국제 통화 체제의 지주라 할 달러 체제는 IMF의 실질적 붕괴로 그 기능이 죽어 가는 과정에 있으며, 국제 무역 질서를 유지해온 GATT 체제는 각국의 자국 보호 우선 정책으로 말미암아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또 남북 문제 자체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서 해빙 과정의 여파를 받아 탈색되기 시작했으며, 73년 말의 유류 파동을 계기로 퇴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신과 보복이라는 전전의 정신 상황이 다시 노골화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는 식량·원유·광산물 등 기초 물자의 무기화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현대 자본주의 해제가 전제로 하는 싼 에너지와 식량, 그리고 대량 소비를 위한 자원의 무제한의 낭비라는 3대 조건은 이제 지구상에서 재생될 가능성이 없어지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세계 경제는 구조적으로 개편되어야할 숙명 속에 있는 것이며 그 전환 과정으로서 「인플레」와 불황의 일반화가 노정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그 전환 과정이 얼마동안이나 걸릴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 경제가 조만간 중대한 파동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 어떤 성격의 파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태풍권 속에 들어간 세계 경제는 비록 상호 협조 밖에 살 길이 없다는 양식 때문에 파국의 시기를 연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끝내 그러한 양식이 지탱되기에는 너무나 세계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발등에 떨어진 위기 의식이 양식을 마비시킬 시한을 단축시키고 있는 상황을 되돌릴 힘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게 되어 있다.
상호 협조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불신이 더욱 심화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세계 경제력의 70% 이상을 지배하는 소수 선진 공업국들이 국내 불황을 견디기 어려워 확대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그 때문에 파생될 국제 수지 적자폭의 확대를 수입 억제·수출 촉진 정책으로 대응할 공산은 매우 짙다. 만일 그러한 과정이 불가피한 본질적 추세라면 세계 경제는 이제 혹독한 「인플레」와 무역 질서의 근본적인 교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곧 30년대와 같은 공황으로 빠져들 조짐을 뚜렷이 한 것이다.
반대로 국제 경제 질서를 유지키 위해 안정을 회복시키려 한다면 각국은 실업율의 증가와 정치적 위기, 그리고 노동조합의 반발이라는 감당키 어려운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황 대책도, 인플레 대책도 제대로 집행할 수 없는 혼돈 상태가 결국 무엇인가 자연 조정력에 의하여 정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멀지않아 전개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 경제의 본질적 상황을 이처럼 평가한다면 75년의 세계 경제가 얼마나 성장하고 또 물가 상승율은 어떻게 될 것이냐를 계량적으로 풀이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자명하다. OECD가 회원국 성장율을 0·5%로 예측한 것이라든지 75년 중에 불경기가 반전될 공산이 없다는 전망을 제시한 것은 지극히 산술적인 차원의 것에 불과하다.
공황이나 파동은 신뢰감이 파괴되는 것과 동시에 야기된다는 점에서 정확한 예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제사는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언제 신뢰감의 붕괴가 노출되느냐에 있을 뿐임을 주목해야 한다.
세계 경제가 평 수위를 걸어가는 상황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역 의존도가 70%를 넘고 있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차원에서 국내 정책을 구상·집행하는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원래 파국적 상황에서는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원시 상태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타국에 부담을 전가시킬 공업력을 보유하지도 않았거니와 보유 자원을 무기화해서 대항할 능력도 없는 우리로서는 풍부하고도 안가한 자원과 안정된 세 계시장을 전제로 해서 고율 성장을 계속 시도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안가한 곡가와 그를 전제로 한 저임금 정책도 고수될 수 없다. 기계 공업을 육성한다는 전제로 소비성 원유 소비를 촉진시키는 자동차 공업을 육성하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석탄 값을 누름으로써 자원 개발을 억누르는 대신 상대 가격의 모순 때문에 소비가 억제되던 유류 소비를 다시 조정키 위해 건축 허가제를 원용하는 모순도 재고되어야 한다. 고급 주택을 건축키 위해 철재나 고급 목재를 수입해야하는 낭비도 시정되어야 한다.
종전의 수입 정책은 생산량 증대라는 물량적 각도에서만 운영되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고수할 수 없다. 기초 소비는 보장하되, 임의 소비는 대폭 억제해야 한다는 각도에서 수입 정책이 근본적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절실하지 않은 상품은 생산하지 않아도 국민 생활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임의 소비품 생산은 대담하게 억제하거나 중단하는 용단이 없이는 악화되는 국제 수지를 막기 힘들 것이다.
수출 정책도 물량이나 성장율을 기준으로 할 수는 없다. 외화 가득율을 중심으로 하는 부 위주의 수출을 중시하도록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또 일시적인 수출 증대를 지원하는 정책 보다는 수출의 지속성을 중심으로 하는 안정된 지원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이 일련의 문제점들은 산업의 재편성이라는 엄청난 과제와 직결되는 것이며, 산업 구조 개편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규모의 투자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난제가 있다.
산업 구조 개편은 맨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 구조의 변화를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점에서 장기 과제다. 그렇지만 장기 과제의 추구는 단기 정책의 누적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점에서 단기 정책과 장기 정책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국제 경제의 여파를 극소화시키느냐가 당면한 최대의 정책 과제임을 깊이 배려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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