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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프롤로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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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재작년이 월남전의 종결로 상징되는 화해시대의 개막의 해였다면 작년은 세계에 새로운 질서가 꿈틀대기 시작한 해였다. 그래서 우리는 72년을 『냉전시대의 종언』, 그리고 73년을 『진통하는 새 질서』라고 특징지었었다.
태동을 시작한 세계의 「새 질서」는 그러나 아직껏 그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세계의 관심은 핵전쟁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영구평화를 위한 제도적 보장과 같은 국제정치의 평상적인 관심사 보다 인구·식량·실업과 같은 당면 국내문제에 얽매여 허둥대는 것으로 한해를 보냈다.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지만 무너지기 시작한 기존질서에 대한 대안은 선뜻 그 윤곽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래서 74년의 세계를 『전환기의 「카오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향방 가늠못할 「새 질서」>
살육의 총성이 지구 도처에서 올린 것은 금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키프로스」의 7월 전쟁, 「크메르」내전 말고도 월남의 불안한 평화는 전시 이상의 인명피해를 내고있고 중동에서는 간헐적인 전쟁재발의 경고가 발해지고 있다.
중남미제국을 비롯해 세계 도처에서 풍미하는 도시 「게릴라」들의 「테러리즘」, 「아프리카」흑인부족들의 독립전쟁, 여객기납치 등등 폭력사태는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인도가 핵실험을 함으로써 준 핵 확산의 충격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아직껏 도사리고 있는 「이데올로기」대립이란 측면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인류가 당면한 위기의식에서 본질적으로 연유한다는 점에서 볼 때 금년처럼 인류가 자신의 장래에 대해 심각한 전의를 품은 적은 없을 것이다.
최대의 도전은 자원문제였다.
물론 그것은 「아랍」자국의 석유 무기화에 따른 「에너지」위기에서 유발된 것이지만 마침내는 지구상의 가용자원이 「유한한 것」이라는 데 대한 인식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유엔」자원총회에 이어 「유엔」이 주관한 「부카레스트」인구회의, 「로마」식량회의가 열렸지만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만 문제의 제기만으로도 위기의 핵심은 노정된 것이다. 「무한자원」이란 전제 위에 찬란히 꽃피었던 서구문명이 절정을 지나 바야흐로 사양화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게끔 되었다. 금년 들어서 있은 서방 주요국들의 수뇌교체의 근본적인 원인도 결국은 이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사양길 접어든 서구문명>
「워터게이트」도청은폐사건과 관련, 미국의 「닉슨」이 물러났고 「브란트」서독수상은「기욤」간첩사건 때문에 수상직을 내놓았다. 「프랑스」에서는 「퐁피두」전 대통령의 급서로 실시된 선거에서 「지스카르-데스텡」이 좌파연합의 「미테랑」을 13만표란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두 차례의 총선을 거쳐 「윌슨」의 노동당이 단독 다수당내각을 성립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본의 「다나까」(전중각영)도 금권정치에 대한 지탄에 몰려 퇴진했고 「캐나다」와 호주에서도 「트뤼도」와 「휘틀럼」이 각각 승리는 거두었지만 총선이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탈리아」의 정치불안은 극단파에 의한 「쿠데타」설을 실감나게 하고있으며 「베네룩스」3국, 배구제국도 한차례의 정권교체극을 겪었다.
구미 선진국들이 예외 없이 겪은 이같은 정치적 격변은 물론 제각기 처해있는 여건의 차이를 고려에 넣는다 해도 하나같이 내정상의 실정이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같은 실정의 근인이「인플레」 불황으로 국민생활수준의 상대적인 저하에 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플레」 불황 등 경제적인 위격파가 중진 내지 후진국에 미친 영향은 선진국의 경우처럼 반드시 정권교체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해도 그 이상으로 크고 심각하다.
실정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도발했다가 함몰당한 「그리스」군정지도자 라든지, 마지막 식민제국에 연연하다가 바로 식민지전쟁의 도구였던 자신의 군부에 의해 괴멸당한 「포르투갈」의 「카에타노」는 「역류」가 좌절된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셀라시에」 「이디오피아」황제의 경우는 더욱 비극적이다. 「솔로몬」의 후예를 자처하던 이 절대군주를 무너뜨린 군정과격성은 수십년을 두고 누적된 실정에 대한 「숙명적 반작용」이기도 하다.
「말레이지아」·태국·「버마」·월남·「인도네시아」·「필리핀」등 동남아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데모」·폭동 등 소요는 이념상의 이유보다는 실정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는 색채를 더욱 짙게 띠고 있다. 후진국 정치체제의 이 같은 동요가 선진국의 경우처럼 가시적인 정권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후진국 특유의 「정치적 제동장치」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수파 실력 갖춘 제3세계>
탈냉전의 주역, 강대국들은 변화된 세계에서도 그들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기 위한 「화해외교」의 노력은 늦추지 않았다. 지난 6월 「닉슨」의 「모스크바」방문도 그렇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미국·소련 정상회담에서 SALT(전략무기제한협정)에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강대국 중심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그들의 목적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노력이 현상고정으로 동결될 수 있다는 자신을 강대국 자신들도 갖고있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작년의 4차 중동전을 계기로 부상한 「제3세계」가 세계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한결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강대국에 의한 평화」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1천억「달러」에 육박하는 「오일달러」의 압력을 배경으로 한 「제3세계」는 국제정치무대에서도 단순한 「다중」이 아닌 실력을 갖춘 다수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제 산유국중심의 「제4세계」가 「제3세계」이념을 어느 만큼 뒷받침해주느냐에 따라「제3세계」는 무시 못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74년의 세계정치에 밀어닥친 자원궁핍의 회오리바람은 예상 이상으로 거센 것이었다. 그 결과 내년도 초기의 국제정치무대를 풍미한 새 세계질서 지향적인 화해외교는 각국이 당면한 내정의 위기 속에서 시들어버렸다.
결국 74년의 세계는 국제분쟁이나 협력관계와 같은 국제정치의 소재보다는 범세계적인 위기감 속에서 각국이 자체 단위로 이를 극복해 보려는 발버둥과 거기서 연유된 혼란으로 특징지어지는 암담한 모습을 남겨놓은 셈이다. <외신부>
차례
①프롤로그
②자원위기의 쇼크
③서구 민주주의의 딜레머
④단결 다지는 「제3세계」
⑤후진국정치체제의 동요
⑥동서 「해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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