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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제자 김태선>|<제41화>국립경찰 창설(54)|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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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잇단 암살사건>
1949년은 마치 암살사건의 해와도 같았다.
이해 3월29일에는 앞서 말한 박일원씨가 피살되는가 하면 6월26일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흉탄에 쓰러졌고, 8월12일에는 서울시경 사찰분실 장 김호익 총경이 암살됐다.
이에 앞서 같은 해 3월17일에는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있던 미국인 원한경 박사(본명 「호레이스·호런·언더우드」)의 살해사건이 일어났다.
「언더우드」부인 피살사건은 여사가 우리나라에서 많은 공적을 남긴 은인인데다 외국인이라는 특수사정으로 일반의 놀라움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에 준 충격도 대단했다.
원 부인은 이날 하오2시30분쯤 정부수립과 때를 같이 해서 외교사절로 우방을 순방하고 돌아온 모윤숙 여사를 환영하기 위해 교수부인 등 여류명사 30여명을 연대뒷산에 자리잡은 자택으로 초청, 환담 중에 있었다.
이때 청년 한 명이 부엌뒷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섰다. 부엌 안에는 요리사 이재선씨가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눈코 뜰 사이 없이 손을 놀리고 있었다.
청년은 권총으로 이씨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지금 회의가 열리고 있느냐. 모윤숙이도 왔느냐』는 등 몇 마디 말을 던지고는 이씨를 방 쪽으로 밀어 넣었다. 겁에 질린 이씨가 현관 옆 응접실에 있던 「피아노」밑으로 기어들며『부인!』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또 한 명의 청년이 현관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이때 이씨의 고함소리를 들은 원 부인이『왜 그래?』하면서 현관 쪽으로 뛰어나왔다.
순간『탕』하는 총성이 울리면서 원 부인은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손님들 가운데는 놀란 나머지 방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모윤숙씨 동 몇 명은 기절해 버렸다. 피투성이가 원 부인은 곧바로「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른쪽 머리부문에 치명상을 입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는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즉시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 언론기관에 보호관계협조를 요청토록 지시하고, 즉시 경무대로 달려가 이승만 박사에게 사건경위를 보고했다.
이 박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공산당의 소행이겠지. 빨리 범인을 잡도록 해』하고 몹시 언짢아했다.
이 사건은 먼저 미국 측에 통고되고 나서 3일 만에야 각 일간신문에 보도됐다.
그동안 나는 서울시경의 전 경찰력을 동원, 수사에 나서도록 했다. 당시에는 사찰분실·민보단 등 이 조직돼 있어 수사기능이 제법 우수했었다.
다행히 범인은 서울시경 최운하 사찰과장·서대문경찰서장 이하성 총경의 지휘로 사건발생 5일만에 검거돼 사건관련자들은 일망타진됐다.
범인은 남로당학생 「프락치」책임자이며 민주학련 위원장이던 연희대학생 김석준(24·일명 천성조)을 비롯한 소의 민주학련 행동대원들이었다.
이들은 모윤숙씨를 살해하려 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원 부인을 살해함으로써 미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켜 한·미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목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이 사건이 나자 교육계는 물론 일반사회에서는 원한경 박사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 온 일체의 사업을 버리고 귀국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했다.
그러나 원 박사는 『나의 처는 이미 죽은 몸인데 애써 범인을 잡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사건으로 한국청년들이 고생할 까 봐 걱정이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원 부인의 장례식은 그 달 22일 하오2시30분 신문 내 교회(현 새문안 교회)에서 거행됐다.
원한경 박사는 1884년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온 원사우씨(H·G·언더우드)의 아들로 아버지가 설립한 경신학교교사를 거쳐 조선신학대학학장과 연희전문학교명예총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의 청년교육에 이바지해 왔었다.
원 부인은 1913년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와 원한경 박사와 결혼했었다.
사망당시 원 부인은 4남1녀와 며느리·손자·손녀들을 두고 있었으며 고아구제사업과 육영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원 부인은 한강변 천주교도 순교기념관이 있는 절두산 왼편 야산에 묻혔다.
원 부인의 저격범과 관련자들은 그 해 10월22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언도공판에서 사형 내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무기징역을 받고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안석규(23)와 김동휘(22)는 6·25때 괴뢰군들에 의해 모두 석방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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