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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 대원칙, 생활에 지장 주지 말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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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임금체계를 바꾸기 위한 노사정 논의가 시작된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사정 사회적 논의 촉진을 위한 소위원회’에서다. 통상임금 확대, 근로시간 단축, 정년연장과 같은 굵직한 노동 현안의 시행 방안이 이곳에서 수면 위로 오른다. 이들 현안은 임금체계를 개편하지 않고선 연착륙하기 힘들다. 이 점에는 노사정이 모두 공감한다. 그러나 준비할 시간이 없다. 통상임금은 대법원 판결로 이미 확대됐다. 정년 60세는 1년10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근로시간 단축도 조만간 법제화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임금체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일본은 한국처럼 연공성이 강한 호봉제였다. 지금은 성과와 생산성 중심의 임금체계로 확 바뀌었다. 일본 기업들은 어떻게 임금체계를 노사 합의로 무리 없이 바꿀 수 있었을까.

 1978년 일본 도레이사는 심각한 경영위기에 몰렸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가 섬유와 화학제품을 주로 생산하던 도레이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 직장에 뼈를 묻는 이른바 종신고용제를 운용했다. 임금은 해가 바뀌면 자동적으로 올랐다. 74년엔 일본 기업 평균 임금 인상률이 31.8%에 달하기도 했다. 도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임금과 고용구조 속에선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힘들었다. 도레이는 경기불황을 극복하면서 고용을 유지하려 새로운 임금제도를 내놨다. 55세를 기준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 재평가 제도’ 도입이었다. 55세에 일률적으로 임금을 20% 떨어뜨려 정년(60세)까지 운용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정년 60세가 법제화(2013년 4월)된 뒤 급부상하고 있는 ‘임금피크제’와 같은 형태다.

 이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80년대에 55세 이후 임금을 15~25% 정도 감액하는 방식이 퍼져나갔다. 55~58세에 15%, 59~60세에 추가 10% 떨어뜨리는 방식이다. 일부 경영 사정이 좋은 곳은 55세 이후 15% 떨어뜨린 뒤 60세까지 계속 이어가는 방식을 쓰기도 했다. 노조의 반응은 어땠을까. 일본렌고(노조총연합회)의 스다 다카시(須田孝) 총합국장(사무총장)은 “정년연장으로 생애(평생) 임금이 늘어났기 때문에 연령에 따른 일시적 하락에도 불만이 없었다”고 말했다.

 회사도 노조의 협조에 화답했다. ‘임금 재평가 제도’ 시행 2년 만인 81년 삭감 범위를 0~20%로 재조정했다. 석유파동의 여파가 가라앉은 데다 급격한 임금삭감으로 인한 고령 근로자의 생활고를 감안한 조치였다. 그러면서 성과 개념을 고령자에게 적용해 삭감범위를 차등화했다. 87년부터는 일률적인 20% 삭감 제도를 폐지하고 임금체계를 일정한 나이가 되면 떨어지도록 전면 수정했다. 임금피크제란 과도기적 조치를 임금체계 개편으로 이어간 것이다. 당시 바뀐 임금제도의 골격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임금을 결정할 때 다섯 가지를 고려한다. 그 첫 번째가 생계비다. 생활 실태나 가족 구성, 물가 동향과 같은 근로자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를 참조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이나 기업의 지불능력에 앞서 고려된다. “생활에 지장을 주는 임금은 근로자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결국 기업의 가치를 하락시킨다”는 것이 일본 경영계의 생각이다. 노조가 임금피크제를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 이유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에선 52세쯤부터 생활비가 줄어든다. 자녀가 독립하는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이 때문에 일정시점에 임금이 줄어도 생애임금은 늘어나고,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마쓰오 다케시(松尾剛志) 후지쓰 노조 노동복지대책부장은 “기업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산성이 다소 떨어지는 시점부터 임금을 떨어뜨리고, 생산성이 높은 연령대에 임금을 더 주는 방식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청년 인력을 수혈하기 위해서도 임금제도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인천대 김동배(경영학) 교수는 “법제화에 따른 급격한 정년연장을 눈앞에 둔 한국도 일본처럼 과도기적이나마 임금피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해도 생애 임금이 늘어나 근로자에겐 큰 손실이 없고, 자녀 세대의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국 기업 가운데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은 42%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신규 채용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면 정년연장에 따른 기업의 추가 비용부담이 최소 90조원에 달한다는 분석(이지만 연세대 교수)도 있다. 한국기술교육대 어수봉(경제학) 교수는 “이런 추가 노동비용을 기업이 일방적으로 부담하게 되면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청년 고용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쳐 결과적으로 고용시장까지 큰 타격을 입게 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생각이 다르다. 노동계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12일 내놓은 임금피크제 모형(본지 2월 13일자 5면)에 반대한 바 있다. 한국노총 이정식 중앙연구원장은 “추가 부담분은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는 기업의 준비금 성격이 강하다”며 “고령 인재를 활용하고 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므로 일방적인 임금삭감은 안 된다”고 말했다.

도쿄=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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