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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제자 김태선>|<제41화>국립 경찰 창설(35)|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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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박창길 검사 총살>
여순 반란 사건은 군경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수습단계에 접어들었다. 사건발생 5일 만인 그달 24일 순천이 수복되고 27일에는 여수가 탈환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반란군들이 물러간 뒤에도 지방 폭도들과 일부 학생들이 죽창과 경찰에서 빼앗은 무기로 무모한 저항을 계속했다.
군경 진압대에 대해 가장 악질적으로 저항했던 것은 여수중학교 여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시내로 진입하는 군경 진압대를 환영하는 것처럼 가장, 『아저씨 물 잡수시고 가셔요』하며 골목길로 유인, 치마 속에 감추었던 권총으로 군경 진압 대원들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어린 남녀 중학생들은 또「카빈」으로 무장,「게릴라」전을 벌이다 군경 진압대의 총탄을 맞으면 「인민 공화국 만세」를 외치면서 쓰러져갔다.
철없는 여학생들이 반도들에게 가담한 것은 당시 여순 반란의 민간 총지휘자인 송욱이 여수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불온사상을 주입했기 때문이었다.
군경은 민간 폭도들과 양민을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
폭도들은 상의 안쪽에 작은 인공기를 붙이고 있었지만 겉으로 봐서는 식별할 수가 없었다.
군경 진압대는 철모와 경찰모에 흰 띠를 둘러 식별토록 했으나 나중에는 반군들도 이를 허용했다.
이 때문에 쌍방이 마주치면 「동무」라고 불러본 뒤 반응을 보아 눈치껏 대처했다.
순천이 수복되자 경찰은 폭동에 가담했던 주민들과 민간 폭도들을 색출, 모조리 구속했다.
경찰은 이들 가운데 악질적이었던 12명을 그해 10월25일 순천농업학교 교정으로 끌어내다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해 버렸다. 재판도 거치지 않은 즉결처분이었다.
이때 총살당한 사람 가운데는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창길 검사가 포함돼 있었다.
반란 사건 당시 반군들은 경찰관은 물론, 공무원 및 우익 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나 박창길 검사만은 반군의 살해 대상에서 빠졌을 뿐 아니라 반란 중에도 대로를 활보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같은 점으로 미뤄 박 검사가 반군들과 내통했다고 추정, 수복되자마자 판사에 있던 박 검사를 끌어내다 민간 폭도들과 함께 처형했던 것이다.
경찰은 또 당시 순천출신 국회의원 황두연씨도 평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다하여 총살하려고 했으나 황 의원은 재빨리 몸을 피해 총살을 모면했다.
이 때문에 황 의원은 그 뒤 한동안 출신구로 내려가지 못하고 피신해 다니기까지 했다.
박 검사 총살사건은 실로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경찰관의 손에 현직검사가 총살당한 사건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6·25동란 같은 혼란을 겪으면서도 이 같은 사례는 없었던 것이다.
반란이 수습되자 박 검사의 유족들은 박 검사가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총살됐다고 주장, 흑백을 가려 경찰 책임자를 처벌해 달라는 요지의 탄원서를 법무부장관 앞으로 제출했다.
박 검사는 사법 시보 시험에 합격, 사법 요원 양성소에서 6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순천지청으로 부임한지 6개월도 안돼 반란 사건을 맞았던 것이다.
당시 법무부 검찰과장 선우종원씨 (현 국회사무 총장)에 따르면 박 검사는 성격이 강직한데다 순천에 부인한 뒤 경찰관의 독직 사건을 철저히 다루어 반란 사건 전에도 이미 몇 차례 경찰과 마찰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특히 가족들은 박 검사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공산당에 쫓겨 월남한 반공인사라는 점을 지적, 박 검사 총살 사건은 검찰에 반감을 가진 경찰의 보복 행위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검찰과 경찰의 협조 및 지휘 체제는 재대로 확립되지 않은데다 미군정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경찰의 풍조가 불식되지 않아 곳곳에서 경찰은 검찰과 불화를 빚었었다. 경찰의 검사 질시풍조는 정부수립직후 모자라는 검사를 대량으로 모집한데도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건국 초기 검사의 부족 인원은 전국적으로 1백50여명에 이르렀으나 고등문관시험·변호사시험·52호 시험 (일본 변호사 시험의 일종) 합격자까지 합쳐도 검사 지망자는 35명뿐이었다.
법무 당국은 이 때문에 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거나, 일제 때 법원이나 검찰 서기로 5년 이상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검사로 특채, 사법 요원 양성소에서 교육을 시킨 뒤 배치했다.
이들 특임 검사들은 현지에서 경찰과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문제의 박창길 검사도 이들 특임 검사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이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박 검사의 총살 사건은 검찰에 반감을 가진 경찰관들이 폭동 사태를 이용, 보복 행위로 저질렀다는 가족 측의 주장이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지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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