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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의 이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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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는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비로소 시민적인 모든 자유를 회복하였다. 그 중에서 중요한 하나가 교육에 대한 자유였다. 억압되었던 일제의 교육정책에서 풀려나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가 곳곳에 설립되고 누구든지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자유를 구가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당시의 사학의 윤리는 교육자유에 있었고 피압박민족의식을 불식하고 자주독립정신을 함양하는데 있었다. 재정난에 허덕이고 지지부진한 관학에 대하여 사학은 교육목적이나 교육방향 설정에 추진력이 되었고 문교정책을「리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해방직후 혼란의 교육 단절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교육은 사학 지도자의 다수 배출과 훌륭한 지도가 단절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관학시대를 사학시대로 바꾸어놓은 것이며 4·19학생의거는 우리들의 교육정신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6·25후의 황폐한 사학의 복구는 노력과 정성에 미군의 구호원조와 기성회비·사친회비 등 학부형으로부터의 기부금모집의 자유가「플러스」되어, 또 그것이 올바르게 쓰여져서 순조롭게 복구가 진행된 것이다. 학생들의 수업료, 기타 공납금은 저렴했지만 교사에 대한 대우도 관학보다 사학이 나아 사학전성시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학경영자는 사학을 사유재산시하고 재단이사회 구성이나 학교관리직담당의 가족화 현상이 나타나기에 이르렀고 한편으로 학교재정의 여유로 교육 외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 일시 사학의 문란 시대를 맞이했었다.
급기야 사립학교 법이 공포되고 사학의 공공성이 새로운 사학윤리로 등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사학설립기준은 강화되고 기부금의 억제, 공납금의 지정, 재단예산과 학교예산의 구별 등으로 사학운영에 대한 문교행정의 간섭이 날로 심해지게 된 것이다.
석유파동 이래의 물가고에 허덕이는 사학경영자들에게 계속되는 교직원의 대우개선이 관학의 대우개선을 뒤따를 능력을 상실하였고 본래부터 빈약했던 중고교의 사학재단은 출혈의 한계에 도달한 감이 있다.
69년도의 중학교입시추첨제에 이어 74년도에는 일부 고교입시추첨제도 시작되어. 교육법에서 학교장의 입학허가권은 삭제되고, 보결생이나 전입생의 입학권 마저 박탈되고, 교사채용에 있어서도 교육위의「풀」제로 배치를 받을 뿐 인물의 성적 여하를 따져서 자기학교에 필요한 교원인가, 아닌가 선택할 자유마저 잃어버렸다.
교육의 질적 향상보다는 수적확보에만 치중한 감을 주는 사학간섭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학의 명문·전통·특질을 살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 사학경영의 의욕이 감퇴되는 경향에 있는 것은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중고교의 평준화는 부실재단을 끌어올리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결코 우월한 재단을 끌어내리는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의 사학의 윤리는 사학의 자주성의 회복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사학의 자주성을 보장하고 사학의 보호를 위하여 예지를 모을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우승 열패의 원칙에 의하여 부실한 재단은 가차없이 도태되어야하고 능력 있는 재단은 적극적인 보호육성책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유학교의 입시 제는 부활되어야하고 학교재단에 대한 기부나 증여는 재단이나 기부자에게 어떠한 명목의 세금도 과하지 말고 쉽게 재단에 돈이 모이도록 하는 정책을 써야하며 공납금은 통제를 풀고 사학의 자치에 맡겨져야 한다.<전봉덕(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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