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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써 이 난국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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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누구의 눈으로 보나 또는 어느 국면을 보나 우리가 당면한 지금의 이 시국이 참으로 어려운 고비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고비의 어려움은 국내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오, 또한 국외에 국한되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더욱이 이 어려운 고비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을 뒤덮고 있는 다층 적 구조로 보이고 있다.
밖으로 온 세계에는 지금 한결같이 살인적인「인플레」와 경기후퇴의 어두운 그림자가 번져가고 있다. 지난가을 중동제국의 석유무기화정책이 휘몰고 온「에너지」파동은 여태껏 문명세계가 자명한 것처럼 전제하고 있던『값싼 동력』이라는 산업기반과 가격체계를 그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아버렸다.
이로 해서 더욱 가열화 된 국제적인 자원전쟁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이른바 자원민족주의라는 이름 밑에 국제적인 협조보다 다시 국가적「에고이즘」의 상극·각축을 부채질하고있다.
설상가상으로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세계적 식량문제의 위기 또한 점차 구제할 길이 막연한 극 악의 상태에까지 당도할 조짐조차 보인다. 폭발적인 인구증가에다 겹쳐 작년 이래의 이상 기후는 세계적인 농작물작황에 큰 변고를 일으켜, 1초당 25명 꼴의 아사자를 내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마저 전하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국제정치·세계경제의 난기류는 본래 자체자원이라고는 별로 가진 것이 없고, 전체경제의 7할을 대외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한국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누구의 입에서나 살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말이 들린다. 경제성장과 수출은 둔화되고 있다. 물가는 뛴다. 실업자는 늘어간다. 장사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불황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난국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안을 병 발한다. 조업단축과 실업 그리고 실질소득의 감소로 생활수준의 향상을 요구하는 사회문제가 그것이다. 경제성장에 비례해서 커지고 있는 상대적 빈곤의식 또한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사회적 불안에 덧붙여 그를 집약, 증폭하고 있는 것이 정국의 불안이다. 오랜만에 열린 국회는「개헌」특위 안 협상에 좌초하여 이미 주 여를 공전하고 있다. 여와 야는 서로가 자기 주장을 확집 하여 촌 보의 양보도 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데모」로 술렁이는 대부분의 대학가는 벌써 한달 가까이 문을 닫고 있거나,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교회조차도 평온하지가 않다. 말하자면 사회의 전체 공론 층이. 균열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평면적으로 볼 때 이처럼 공·사 생활의 전 영역을 뒤덮고 있는 현재의 난국은 건국 후 4반세기에 걸친 이 나라의 사회적 성취를 허무한 것으로 돌릴 우려마저 없지 않다. 말하자면50년대에 뿌리박고 성장한 한국의 민주적 역량과 60년대에 세계에 과시한 한국의 경제성장의 가치 조차현재의 난국은 지금 의문에 붙이고 있는 것이다. ,
경제적인 불황도 물론 하나의 위기요, 사회적인 불안도 또 하나의 위기다. 정국의 경화는 더욱 큰 위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위기는 이 위기에 대처해서 그를 극복할 힘이 지리멸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론이 두 동강이가 나고, 여-야가 극한대립을 하고, 정부와 국민이 상호불신하고, 노사간의 평화가 깨지고, 신-구 세대, 교사와 학생간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위기에 대처할 힘을 약화시키고 있다.
하나로 뭉쳐서도 난국을 뚫고 나가기가 힘들겠거늘, 사회의 지도층·공론 층이 이처럼 각기 대립·분열해 있고서야 어떻게 이 어려운 고비를 이겨낼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 오늘의 난국의 가장 심각한 본질이 있다고 할 것이다.
뭉치면 여하고 갈라지면 망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진부한 진리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뭉칠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할지도 모른다. 바르고 고르면 뭉쳐질 것이며 바르지 못하고 고르지 못하면 갈라질 것이다.
바르지 못한 명분 밑에 뭉치라 한다면 힘에 의해서 한때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영속적인 단결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에이브러햄·링컨」도 말한바와 같이『일부의 사람을 영원히, 혹은 모든 사람을 일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의 배분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도 뭉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바른 명분과 함께, 복지의 증대, 이른바 사회의 정의만이 참으로 힘있는 단결과 화합의 기반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사회정의·사회복지를 외면하는 경제성장·경제발전이 본말전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경제발전 없이 사회정의·사회복지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한국경제는 지난 10여년 동안 비약적이라 할 이만큼 성장한 게 사실이다. 이제 그 경제성장으로 일단 커진 몸에 맞는 사회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렇다고 지나치게 성급한 나머지 커진 몸뚱이에 작은 옷을 억지로 입히려고 해서도 안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경제발전과 사회정의의 조화요, 성장과 복지 사이의 조화다.
그리고 이러한 조화를 낳는 힘은 무엇보다도 사람사이의『화』라 할 것이다. 정부와 국민, 여와 야, 고용인과 피고용인, 교사와 학생,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그리고 교회와 세속의『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 사람의『화』야말로 모든 조화를 낳는 근본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한국이라는 똑같은 배에 타고 있다. 격랑이 이는 국내외의 어려운 난국이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탄 배를 어지럽게 요동시키고 있는 판국이다.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이상 우리의 운명은 모두 다 이 배의 운명에 좌우된다. 그 점에서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파트너」사이에도 서로 똑같은 상호 의존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 어려운 고비를 이겨 나가기 의해서 정부도, 국민도, 여도, 야도, 사용자도, 근로자도, 학생도, 종교인도 모두「나」만의 입장을 한번 떠나서 한 걸음씩 후퇴하고 반성하여 우선 사람의『화』를 되찾기를 간절히 촉구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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