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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없는 '꼬마 도둑' 평생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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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5면

“문제집을 왜 돈 주고 사니? 그냥 서점에서 한 권 집어오면 돼.”

얼마 전 김모(중3·서울 잠원동)군은 동네에서 같이 그룹 과외를 받는 친구 박모양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박양은 공부도 잘하고 학급에서도 반장이라 모범생인 줄 알았다.

집안 형편도 넉넉한 편이다. 그러나 아이들 끼리 있을 때 박양은 자신이 물건을 훔친 이야기를 자랑스레 늘어놓곤 했다. 이처럼 죄의식 없는 작은 도둑은 도처에 많다.

◆아이들의 도벽 실태=인천에서 10여년째 소수정예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모(48)씨는 얼마 전 아이들의 도벽때문에 진땀을 흘렸다.

학원에 다니는 중학생 10여 명이 떼를 지어 다니며 지하 상가의 물건을 훔치는 놀이를 했다. 이씨는 "예전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도둑질을 했지만 2~3년 전부터는 평범한 아이들이 물건을 훔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1년 조사한 '한국사회의 도덕성 지표 개발 연구'에 의하면 "남의 물건을 슬쩍한 적이 전혀 없다"고 응답한 성인은 75%였다.

반면 중.고등학생의 경우 53%만 그렇게 응답했다. "길에 돈이 떨어져 있을 때 보는 사람이 없으면 가진다"고 응답한 중.고생은 68%, 성인은 39%였다.

학원장 이씨는 학생들의 도덕성 못지 않게 학부모의 태도가 문제라고 말한다. 부모가 자녀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학원을 옮기는 등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서울 청담동 S아파트는 지난해부터 야간 경비를 강화했다. 새 승용차의 장식을 떼 가는 초등학생.중학생들 때문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엠블럼 모으기 경쟁이 붙은 것.

피해자 권모(58.여)씨는 범인을 찾아냈지만 제대로 야단도 치지 못했다. 아이의 부모가 "돈을 물어주면 될 것 아니냐"며 역성을 들고 나선 탓이다.

◆소아.청소년 도벽의 원인=한국청소년상담원(02-2231-2000) 지승희 상담부장은 "아이들의 도벽은 애정 결핍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점검해 보고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최영 교수는 소아.청소년 도벽의 첫째 이유로 부모의 역할이 없는 점을 꼽았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도 여기저기 학원을 다니느라 바쁘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를 지도할 시간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최교수는 "요즘 아이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정서적으로는 과거보다 심한 결핍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돈으로 해결되는 공부 뒷바라지가 아니라 부모의 실질적인 사랑과 애정"이라고 꼬집었다.

김정일 정신과 원장은 "에너지를 마땅히 풀 곳을 찾지 못하는 아이들이 훔치는 행위의 스릴과 긴장을 즐기는 병적 도벽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녀의 도벽을 발견했다면=도벽의 양상을 봐서 대응한다. 일시적인 행동인지 지속적으로 일삼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김원장은 "부모가 너무 인색해도 역효과"라며 "아이의 욕구와 상황을 살펴서 타이를 때는 타이르고 돈을 줄 때는 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의 에너지를 잘 보고 부모와의 관계도 점검해야 한다. 그는 "요즘 경제 교육이 유행이긴 하지만 너무 어릴 때부터 경제 관념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도벽을 눈감아 주는 건 금물이다. 최교수는 "물건을 훔치는 건 남에게 피해를 주고, 법적인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걸 가르치는 기회로 삼으라"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훔친 물건을 돌려주거나 값을 치르고 사과를 하게 한다. 단, 인격을 모독하거나 '도둑놈'이라고 비난하는 건 금물이다. 물건을 돌려준 뒤에는 아이의 노력을 칭찬해줘야 한다.

그러나 유아기의 도벽은 조금 다르다. 유아는 자기 중심적인 성향이 강해 남의 물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무조건 혼내는 건 금물. 아이가 남의 물건을 가지고 왔다면 "이건 네 것이 아니야. 돌려주는 게 좋겠다"라 말하고 함께 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소유 개념을 가르친다.

글=이경희,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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