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신라 천년… 그 영화 담긴 「고분 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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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화 공사 1년 반>
신라 사람들은 사후의 영생함을 믿어 그들이 사는 울타리 안에 유택을 마련해 묻혔다. 적어도 통일 신라 무렵의 고분들이 산과 구릉으로 올라가기 이전에는 그들의 주거가 있는 평지에 커다란 무덤을 만들었으니 곧 오늘날 경주 시내와 인근 마을에 남아있는 4, 5, 6세기께 고분들이 그것이다.
경주 사람들은 옛 풍습을 이어받아 그후 1천 수백년 동안 그 고분들의 사이사이에 집을 짓고 선조를 모시며 함께 살아온다. 이 점은 다른 어느 고도에서 볼 수 없는 경주만의 희한한 풍치.
경주 시내에서도 가장 산더미 같은 고분의 밀집 지대가 미추왕릉이 있는 황남동 일대다. 이 곳은 김씨 집권 후에 궁궐이 된 월성의 서쪽. 그 중간에 계림과 첨성대 등이 있는걸 보면 아마 궁궐의 후원쯤에 해당됐을지도 모른다.
도시 복판의 이 황남동 고분군 지역이 1년 반의 정화 공사로 말끔히 단장돼 18일 고분 공원으로서 개장됐다. 우리 나라에선 처음으로 시도해 본 특수한 성격의 공원이다.

<총예산 6억 투입>
동으로 미추왕릉을 비롯해 서쪽으론 발굴 중인 98호분과 155호분(천마총)에 이르는 3만8천여평. 그 안에 있던 1백85동의 민가를 철거하고 두드러지게 큰 18기의 봉분을 보수하는 한편 주위 2㎞에 석축 담장을 쌓았다. 그리고 발굴하고 있는 98호분과 천마총 중의 하나는 내부를 볼 수 있게 복원해 공개하고 그 지역 출토 유물의 진열관도 구상하고 있다. 이야말로 경주의 또 하나 명소로 꾸며질 전망이다.
이 고분 공원의 설치 예산은 6억원이 넘는다. 민가 철거와 사유지 매입에 약 3억원, 2기의 고분 발굴비 1억4천여만원. 그 밖의 돈으로 담쌓고 문을 달며 1천여m의 산책로도 만들고 지난해 1백28기의 땅속 고분 유구도 들어냈다. 잣나무·은행나무 등 약2천 그루의 관상수를 심고 「벤치」도 17개소에 비치했고 청사초롱형 가로등을 35개나 밝혔다. 그래서 1차 개장은 2기의 고분 발굴 구역을 제외한 동반부 지역만이라도 우선 했다.

<동반부 먼저 개장>
공원 안의 거대한 고분 초기가 모두 왕릉일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번 발굴되는 155호와 98호에도 이론이 없지 않지만 능으로 지정된 미추왕릉 역시 완벽한 확증은 없다. 그렇더라도 당시 집권층의 주요 인물들임엔 틀림없고, 지금 봉토가 없지만 다른 가족들도 주위에 모두 묻혀 있을 것이다. 공원 설치의 도로와 배수로 공사 중에 1백여 기의 유구가 드러났거니와 이 일대의 잔디 덮인 구석구석이 모두 허투루 손댈 수 없는 신라 비보의 땅이다.
98호 고분의 발굴은 연내에 마무리짓겠으나 그것을 공개 고분으로 복원하고 유물관을 부설하기까지는 아직도 수년이 더 소요될 듯 하다. 【글 이영섭 옥치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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