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윌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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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해럴드·윌슨」은 『25년 후의 나』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쓴 일이 있었다. 이 때 나이 12세. 「윌슨」소년은 「대장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21세 때에 그는 정치학·경제학·철학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고 「옥스퍼드」의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1945년엔 벌써 노동당의 입후보로 나서서 그는 국회의 의석을 획득했다. 전후 처음으로 실시된 총선거에서 노동당이 정권을 잡을 무렵이었다. 당시 「애틀리」당수는 그를 「각 외상」으로 천명했다. 그 때 나이 29세. 「애틀리」수상은 「윌슨」의 저서 『석탄에 대한 「뉴딜」』이란 논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는 각 외상이 된지 2년만에 「윌슨」은 「상무상」에 취임했다. 「윌리엄·피드」이래 최연소의 각료가 된 것이다. 「윌슨」 자신이 예언했던 것보다도 출세의 문은 6년이나 앞당겨 열린 셈이다.
영국에선 그를 『의회에서 가장 회전이 빠르고 가장 예민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의 판단력과 숫자에 대한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어릴 때는 그를 천재라고도 불렀다. 길을 걸어가면서 자동차의 번호를 보고 그 평방근을 암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윌슨」의 정치적 신조는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시국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바꾸었다. 당초에 그는 노동당의 좌파였다. 노동당 정권이 국민 건강 보험에 의한 진료를 유료화 하는 안을 내놓았을 때 그는 「어나이어린·베번」을 따라 「애틀리」내각에서 물러났었다. 하지만 「베번」이 노동당 전국 집행 위원을 해임하자, 「윌슨」은 기꺼이 그의 후임자가 되었다.
1963년 「휴·게이츠켈」 당수가 타계한 후엔 그의 정치 노선을 그대로 따랐다. 후임 당수가 되고 나서도 「윌슨」은 한때 자신이 맹렬히 공격했던 「게이츠켈」의 주장을 자기의 것으로 채택했다. 정치적 「카멜레온」으로 변신을 거듭한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의 승리는 그에게 무려 4번째의 것이다. 금세기에 접어들어 그는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록과 그의 정치적 장래와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이른바 「영국병」은 누구의 정치적 수명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인플레이션」은 최근 20%에 육박하고 있다. 「태양이 지지 않던」 영국에 낙조가 드리워진지는 이미 오래다. 정치적으로는 군비 축소와 함께 대영 제국의 전통적 역할을 약화 시켜 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빈번한 「스트라이크」와 함께 「파운드」화는 세계 화폐의 척도에서 탈락되었다. 영국은 사양화하는 자신의 처지에 불안과 초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윌슨」은 바로 그 「영국병」을 다스리는 의사의 역할을 다시금 맡게 되었다. 지능의 천재가 과연 정치의 천재도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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