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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큰 손자 결단 … 76년 빗장 푼 은둔의 미술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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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간송미술문화재단 전인건 사무국장을 만난 곳은 보성고 이사장실이었다. 그곳엔 이마동(1906~81) 화백이 1956년 그린 간송 전형필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전 사무국장은 “간송은 생전에 신문에 사진이 나간 적이 없었다. 첫 신문 사진이 부고였다”며 조심스러워 했다. 그림 속 할아버지가 자신이 남긴 일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큰손자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그림은 우리 전통 민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76년 만의 첫 외부 전시와 유료 입장, 네이버를 통한 온라인 전시-.

 다른 미술관이 아니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관장 전영우)에서 진행되는 변화라 더 의외로 다가온다. 1938년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이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은 연간 2회 딱 2주씩의 무료 전시 외엔 문을 꼭꼭 닫아걸고 있었다.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등 다수의 국보를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관 산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최완수) 위주의 비영리 연구기관으로 주로 기능해 왔다.

 홈페이지조차 없던 ‘은둔의 미술관’이 지난해 8월 간송미술문화재단(이사장 전성우) 출범 이래 적극적 변화를 모색 중이다. 드러내지 않고 지켜왔다는 이 미술관의 정체성이 훼손될까 우려하는 소리도 일부에서 들린다.

 변화의 주역이자 간송미술관을 이끌 세번째 주인공에 대한 궁금증도 높다. ‘간송미술관 3.0’을 준비하는 전인건(43) 재단 사무국장을 10일 만났다. 설립자 간송 전형필(1906∼62)의 큰손자다. “(간송미술관을) 내것이라 여겨본 적 없다. 그저 행정ㆍ재정적 측면을 도울 뿐”이라며 조심스러워 하는 그의 첫 언론 인터뷰다.
전씨는 1971년 간송미술관이 봄ㆍ가을 정기전을 열며 외부에 물꼬를 튼 해 태어났다. 보성고 졸업 후 미국에서 동양사(루이스 앤 클라크 칼리지)를 전공했다. 현지 연구소를 거쳐 보성고 행정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간송은 1940년 이 학교를 인수했다. 만석군지기 상속자 간송이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준비한 것은 독립 이후였다. 교육과 문화재 보존이 그 수단이었다. 62년 간송이 급서하자 미국서 화가로 활동하던 전성우(80) 이사장이 귀국해 학교와 미술관을 이끌었다. 미술관의 실질적 운영은 동생 전영우(74) 간송미술관장, 그리고 최완수(72) 연구소장이 맡았다.

 - 간송미술관이 어떻게 달라질까.

 “제게도 간송미술관의 수장고는 항상 열려 있는 게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턴 한국 유물이 보고 싶으면 옛 중앙청 자리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드나들곤 했다. 앞으로 상설 전시관을 만들어 보고 싶은 분들이 언제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다. 지금의 간송미술관 가까이에 새 미술관을 짓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다.”

 - 변화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간송 컬렉션도 학교도 저희보다 큰 존재여서, 우리 것이라 여겨본 일이 없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일을 했고, 아버지가 이끌어온 시대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아 우선 지키는 데 주력했다. 지금은 국민적 관심과 애정이 커졌다. 너무 많은 분이 찾아 오시는데 편히 모시지 못해 죄송할 정도다. 변곡점이 왔다고 본다. 누구보다도 더 걱정스럽지만, 걱정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 3∼9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관전에서는 입장료도 받는다.

 “개관전 입장료는 성인 8000원, 학생 단체 4000원으로 일반적 기획전보다는 낮게 책정했다. 모든 걸 새로 준비해야 하는 ‘변화의 운영비’로 봐 주셨으면 한다. 그 준비로 올 5월 성북동에서 정기전 개최는 어려울 듯하다. ”

 - 여전히 미등록 미술관인가.

 “우리 미술관은 세계박물관협회(ICOM)에는 가입돼 있지만 국내 박물관미술관법의 등록미술관은 못 된다. 연간 300일 개방 등의 요건을 충족할 설비와 인력이 안돼서다. 소규모 사립미술관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확대됐으면 한다.”

 - 당신에게 간송은, 또 간송미술관은.

 “제게 주어진 일이고, 중요한 일이고, 반드시 할 일….”

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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