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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의 원점복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긴장의 극에 달했던 한·일 외교분규가 최악의 상태를 면하고 간신히 타결을 보게 되었음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는 한·일 관계가 다시 원점에 복귀했음을 뜻하며, 만일 양국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다면 거기에서 이득을 얻는 자는 두 나라의 어느 쪽도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만도 우리는 안도를 느낀다.
그동안 일본수상의 친서의 문구를 에워싼 외교교섭의 승강이는 물론 몇몇 실무자 사이서만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반일 「데모」에 참가한 인원수가 족히 1백만명을 헤아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 기회에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가 거의 전 국민적인 차원에서 새삼스럽게 국민 모두의 「문제」로서 제기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 격정 속에서 지낸 지난 몇 주일을 냉정하게 반성하고 우리의 앞날을 위해 교훈을 찾아보는 노력이 있어 마땅할 줄 안다.
첫째, 이번 한·일 분규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국제사회에 있어선 영원한 우방도 또 절대적인 우방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우리의 모든 속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을 뿐더러 그걸 받아들여줄 상대도 없다는 얘기다. 그것은 어느 한나라에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나치게 편향하는 의존관계를 지양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날의 한·일 관계는 특히 이점에서 깊이 반성되어야 할 줄 안다. 한국이 앞으로의 대외관계는 정치·경제면에서 다같이 다변화되어야 할 것이며, 가까운 우방에 대해서도, 그럴수록 의연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남」은 결국 「남」인 것이다.
둘째, 이번 한·일 분규의 발단이 된 8·15사건은 그 범죄자체가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처리 과정에도 역시 국제적인 여러 제약요인을 안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오늘날 고도의 국제적인 유대 및 상호의존관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시청이나 여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독립·은둔의 지성은 이마 이 지구상에는 존재치 않는다.
서울에서의 한 사건, 한 정치인의 부지불식간 공약 발언도 그대로 국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외교는 곧 내정의 연장이며 모든 정치는 국내를 향해서나 또는 국외의 세계를 향해서나 같은 언어로, 또 같은 신의·성실의 토대 위에서 행해져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
셋째, 세계 안에서의 정치에 있어서는 아무리 정당한 「국민감정」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적나라한 감정의 차원을 지양해서 이성의 언어를 찾아야만 남을 설득시킬 수 있다.
일본측의 사과를 요구하는 「데모」대가 일본대사관에 침입하여 일본국기를 찢는 난동을 부림으로써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사과를 해야 했었다는 것은 아무리 그 동기가 애국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대국민의 슬기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될 수는 없다. 특히 이러한 「데모」활동을 보도하고 해설하는 과정에서 일부 방송들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과 차마 서면에 옮길 수 없는 광경 등을 전파에 실린 이성잃은 태도는 깊은 반성이 있어 마땅하다.
정치와 외교는 정이 독주하는 곳에서는 결코 장기적인 안목에선 국익에 보탬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교섭의 상대가 있는 외교는 문자그대로 『가능성의 예술』이라 할 것이다.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최선의 명분이나 요구의 극대화는 결과적으로 차선의 실리를 추구함만 못하다. 독립은 면해야되고, 어떤 경우에도 우방과의 유대를 희생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협상에 있어선 사전에 이쪽이 양보할 수 있는 한계와 상대방이 양보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작량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이 어린 한국의 외교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해야 할 것이고 보면 이번 한·일 분규의 타결을 위한 어려웠던 경험은 그대로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한국의 앞날을 위한 귀중한 교훈이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양국 국민간의 뿌리깊은 불신감을 씻고, 서로가 대등한 입장에서 새로운 우호관계를 다져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8·15사건으로 양국국민의 마음속에 더욱 굳어진 불신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 양국의 때묻지 않은 젊은 세대들의 마음의 교류를 트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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