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제40화 기독교 백년(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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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압록강을 건너>
「토머스」목사가 1866년 9월2일 대동강 위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뒤에도 나라안에서의 선교 활동의 시기는 그렇게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은거의 나라」인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개척 사업은 중단되지는 않았다.
「토머스」목사의 뒤를 이은 이는「토머스」목사에게 중국말로 번역된 성경을 주어 한국으로 보냈던「윌리엄슨」목사였다. 그는「스코틀랜드」사람으로 10년 전인 1855년에「런던」선교회 선교사로서 중국에 파견되어 상해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건강을 해쳐 2년 후 본국에 돌아갔으며 다시 l863년「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대표자가 되어 중국에 왔다.
그는 산동성 지부에 거주하면서 당시 선교사들이 가보지 못한 내륙 지방을 탐색하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또「토머스」목사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만주로 내왕하며 조선인을 만나 성경과 전도문서를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윌리엄슨」 목사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한국인에게 선교한 사람은 같은「스코틀랜드」사람인「존·로스」목사라고 하겠다. 그는「스코틀랜드」장로교회 선교사로서 만주 우장이라는 곳에 정착. 선교사업을 했다.
「로스」목사는 한·만 국경에서 열리는 시장에 장사하러 온 한국사람들을 만나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한국사람들은「로스」목사를 남의 나라 기밀을 살피러 온 첩자로 오인까지 했다. 그러나「로스」목사는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전도하면서 한국의 실정과 한국민속에 대한 지식도 얻었고 한국말 개인교사까지 받게 되었다.
그 말 선생은 이응찬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응찬은「로스」목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다가 기독교를 전도 받고 교인이 되었으며「로스」목사가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사 가운데「로스」역 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바로 이때 번역된 것이었다.
이응찬은「로스」목사와 같이 선교하던「존·매킨타이어」목사에게 1876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개신교에서 첫 번째 세례 받은 사람이 되었다.
당시 같은 의주사람들로서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이익세 등 여러 사람이 계속하여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다. 백홍준과 이성하는 성경을 반포하는 전서의 직책을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성경을 반포하는 한편 조정의 감시의 눈을 피해가면서 모임을 의주교회의 기초를 닦았으니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97∼98년 전 이야기다.
백씨는 지금 한독약품 김신권 사장의 조부의 장인이다. 그러니까 백씨의 사위가 김관근 목사고, 김 목사의 아들 희선 양선 형제가 목사였고 손자 광수 광훈 형제(희선의 아들)가 또 목사가 되었다.(김신권 사장은 김관근 목사의 큰아들인 경선의 아들). 성경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믿고 전하는 사람의 자손이 3대를 이어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백씨와 이씨는 우리말 성경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국내로 가지고 와서 전하였거니와, 만주와 국내에서 나라가 금하는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인 것으로 믿고 개척 전도에 나선 사람도 역시 의주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서상륜 서경조(본명은 상우) 형제들이었다.
형제는 홍삼 행상을 하려고 만주로 건너가 여러 곳을 거쳐 영구까지 갔다. 그러나 형 상륜이 장「티푸스」로 앓게되고 행상도 실패하여 이들은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때「로스」와「매킨타이어」라는 목사들이 나타나 선교회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데려가서 병을 낫게 해주었다. 형제는 이로 해서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게됐다.
형 상륜은 봉천으로 가서「로스」목사의 성경번역과 출판사업에 종사하고 동생 경조는 국내로 먼저 들어왔다. 성경번역이 끝나자 상륜은 그 성경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금지되어있는 기독교의 포교가 어려운데다 신변의 위험까지 느껴 형제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으로 갔다. 여기서 그들은 전도하며 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개신교의 최초의 교회가 되었으며 특히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설립된 교회라고 해서 더욱 유명하다. 한편「로스」목사는 남만 일대에 흩어져 살고있는 한국사람들의 부락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하고 훈련을 거쳐 믿는 자 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어떤 곳에서는 한번에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전군 신자화 운동으로 부대 안에서 한꺼번에 3천명이상 세례준 것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당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서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만주에서 세례 받고 한국으로 들어온 사람이 주로 의주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도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선교사가 들어 올 수 도 없고 또 세례식을 공공연하게 행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주에 있는「로스」목사와 긴밀히 연락하여 전도한 사람들이 세례 받을 사람들을 데리고 압록강 한복판 한·만 국경선이 되는 지점에서 선교사와 만나 세례를 받게 했다. 아마도 이 일은 세계 선교사상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일일 것이다.<계속>【강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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