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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내고 또 당기고 … 외로움만 남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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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연극 ‘나쁜 자석’은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자석의 속성에 비유했다. 자석도, 사람도, 가깝게 다가가면 서로를 밀어낸다. 밀어내고 남는 것은 외로움과 슬픔. 인간의 숙명이다. [사진 악어컴퍼니]

정막 그 자체였다. 배우의 대사 사이사이엔 정적만 흘렀다. 연극 ‘나쁜 자석’의 객석에선 작은 소곤거림도,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삶의 고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듯했다.

 ‘나쁜 자석’은 인간의 근원적 고통인 외로움을 네 청년의 성장기를 통해 보여준다. 2000년 스코틀랜드 작가 더글라스 맥스웰이 희곡을 썼고, 2001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았다. 국내에선 2005년 초연됐고, 이번 작품은 뮤지컬 ‘빨래’를 만든 추민주 연출가가 각색·연출했다.

 제목(원제 Our Bad Magnet)은 극 중에서 주인공 고든이 지은 동화 제목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자석에게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자성(磁性)을 없애 ‘나쁜 자석’이 되겠다는 자석의 이야기다. 가까이 다가가면 밀어내고, 또 가깝기 때문에 질투하고 배신하는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자석의 속성에 비유한 것이다.

 등장인물은 넷이다. 아홉 살에 친구로 만났고, 열아홉에 흩어졌고, 스물아홉에 다시 만나 아직도 서로 상처를 주고 있는 사이임을 확인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스코틀랜드 해안가 작은 마을 거반이다. 대장 역할을 하는 프레이저와 그를 따르는 2인자 폴, 바보인 척하며 사람을 웃기려는 뚱보 앨런. 이들 아홉 살배기 무리에 전학 온 아이 고든이 합류한다. 10년 뒤 이들은 밴드를 결성하는데, 프레이저와 폴은 우울한 성향의 고든이 맘에 안들어 탈퇴시키고 싶어한다. 그 말을 앨런이 고든에게 전하고, 고든은 폐교에 불을 지르고 자살한다. 그리고 또 10년 후, 이들이 만나 과거의 기억을 맞춰보며 덮어뒀던 상처를 드러낸다.

 송용진·김재범·정문성·이동하 등 여덟 배우가 나눠맡은 네 인물은 복잡 미묘한 인간 내면을 직설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거친 척’ 속에 숨어있는 슬픔과, ‘웃는 척’ 속에 숨어있는 두려움, ‘너그러운 척’ 속에 숨어있는 소심함 등 단단한 겉포장을 풀어 진의를 밝혀내는 건 관객의 몫이다.

 ‘나쁜 자석’엔 재관람 관객이 많다. 제작사인 악어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막을 올린 뒤 스무 번 이상 유료 관람해 ‘매니아 카드’를 발급받은 관객이 50명이 넘는다. 스무 번을 봐도 해석할 여지가 남는 작품. 그게 ‘나쁜 자석’의 매력이지만, 그만큼 처음 보는 관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연극 ‘나쁜 자석’=3월 2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3만5000∼5만원. 1566-7527

이지영 기자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조용신 CJ문화재단 예술감독) 동화 같은 무대, 감성적인 연출이 인간 내면의 상처를 한발 떨어져 바라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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