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 김환기 형을 애도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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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수화가 가다니…. 참으려해도 자꾸만 눈물이 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겠지만 하늘은 너무도 무심했다.
작년 9윌 미국에 갔던 길에 나는 10여 년만에 그를 만났었다. 그때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고국, 너무도 오고 싶어하던 고향을 멀리 둔 채 이국 땅에서 눈을 감고만 그를 생각하니 새삼 가슴을 찌른다.
환기형은 타고난 화가였으며 인간이라기보다는 선인의 경지에든 우리화단의 귀한 존재였다. 속기라곤 없는 한 그루 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그는「캔버스」를 통해 새로운 추구를 멈추지 않았다.
일본유학시절「모던」한 작품 추구로「2과 9실 회원」에 속했던 그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종달이 울 때」라는 명화를 내놓았었다.
10여 년간 대학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던 그는 다시 56년「프랑스」로 건너가「예술가의 고행」을 시작했고 4년만에 돌아오더니 63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잠시라도 머물러있는 상태를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는 구도자의 길을 그는 걸어왔다.
미국으로 가기 직전인 61년∼63년에는 미 협회장, 홍익대학장, 미 협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환기형은 그자신의 예술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나라의 화단육성에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상우파울루·비에날레」인 상등 권위 있는 해외 전 진출과 외국에서의 수많은 개인전등은 이 나라 미술가들에게 크게 용기를 주었었다.
부산피난시절 우리는 한솥밥을 먹고 지냈을 만큼 아끼는 친구였다. 그랬기에「뉴요크」에서 10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는 쌓인 얘기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할말을 줄였었다. 그에게서 잠시라도 시간을 뺐는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전력투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낮에는 햇빛이 아깝고 밤에는 전등불이 아 까와 쉴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루에 16시간을 일한다고도 했다.
그의 화실은 입추의 여지없이 무수한 점으로 구성된 그림들로 꽉 차 있었다.
그는 고독과 향수를 이기기 위해, 노승이 목탁을 치는 심정으로 점 하나 하나를 찍어 가는 듯했다.
그 무수한 점들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메었었다. 언젠가 맹인이 점자로 쓴 시집을 받고 그 무수한 점에서 시 이상의 감동을 느꼈던 것처럼 나는 환기형이 찍은 점들에서 시와 대화를 들었다.
그는 실로 많은 점들을 남겨놓고 홀연히 갔다. 그의 고운 마음처럼 아름답고 영롱한 점들이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피어나리라. 수화-삼가 명복을 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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