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제4장 관동지방의 한적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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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일본의 수도 동경이 한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하면 못 믿을 사람이 많겠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늘의 동경의 전신「에도(강호)라는 고을이 도성으로서의 터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5백년전인 1456년, 이른바 실정시대의 무장 대전도계(1432∼82)가 강호 성을 축조한 때로부터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역사상 이거대한 도시의 첫 주민들이 다툴 수 없는 한인들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동경에서 가장 번화한 환락가로 손꼽히는「아사꾸사」야말로 오늘의 대동경의 태반이라 하겠는데, 바로 이 고장에 최초의 취락을 만든 것이 한인들이었다는 사실은 문헌상으로도 분명하다. 지금 동경도태동구2 정목 일대 약5만평의 넓은 대지 위에 터잡고 있는 금병산 천초사의 개기 설화가 이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애칭으로「천초관음님」이 이라 불리어져, 연간 참예자 1천만 명이 넘는 이 절의 창건에 얽힌 얘기는 지금도 이 절에 보관돼 있는 4종 10권의『천초사녹기륜권』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성관음상 발견도 한인이>
이에 의하면 이 절의 창건은 대화원년(645), 승해상인의 관음당 건립에 비롯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그 연기는 그보다도 17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추고천고36년(628) 3월18일, 이 고장 우전천 하구에서 금빛 찬란한 성관음상을 발견한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무렵, 이 고장의 조그마한 어촌에 살고 있던 두 어부형제「히노꾸마하마나리」와「다께나리」는 고기잡이를 하던 중 그물 속에 번쩍이는 성관음상을 발견, 이를 향사 토사진중지에게 보였던 바 그는 뭔지 신비스런 힘에 끌려 곧 출가수계하고, 자기 집을 절로 삼아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조석으로 예불을 하게 되었다.
이 소문은 곧 경낙에까지 전해져 서명천황7년(635)에는 수묘상인이 내려와 이 고장에 처음 관음당을 지었으며, 다시 대화원년 앞서 말한 승해상인에 의해 정식으로 성관음상을 비불본존으로 모신 천초사가 창건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 주목할 것은 바닷 속에서 발견한 불상을 모시기 위해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본 연재 제16화의 상근권현 설화나 제17화의 고려사 천수관음 설화와 거의 같은 시대, 같은 맥락을 가진 것일 뿐 아니라, 이곳 천초사의 비불본존 성관음상을 발견한 어부의 이름 또한 명백히 한국계 도내인 임을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어부형제의 성씨가「히노꾸마」라고 명시돼 있다는 사실은 유명한 고송총(일본의 옛 서울 비조지방·현재의 나량 현 명일향촌에서 발견된 고구려 여인상벽화가 있는 고분) 근처에 있는 왕년의 거찰 증외(히노꾸마)사를 연장케 하는 것이다. 현재는「오미아시」곤두로 돼 있는 옛 증외사(지금은 터만 남았다)는 5세기초 일본 조정의 초청을 받고 백제에서 파견됐다는 왕사 아지사주·도가사주의 자손들(동문씨)의「우지데라」인데 그 절 이름「히노꾸마」(증외)와 어부형제의 성씨「히노꾸마」가 같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일 수 없는 것이다.

<비불이라 일반공개 안해>
이렇게 보면, 오늘의 일본 수도 동경이 7세기초부터 이곳에 정착한 한국계 도내인들에 의해 개척되고, 발전된 고장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 이후로도 이곳 천초 일대와 한인들과의 특별한 인연은 여러 모로 끊기지 않았다. 우선 이 절의 본존불인 금동제 성관세음보살상은 전기한 바와 같이 645년의 천초사 창건이래 비불이라 하여 일반공개가 안되고 있지만, 그 뒤 자식대사(798∼864)에 의해 이 본전비불을 모사해서 조각한 목각어영(53×29㎝)을 통해 보면 일목요연하다. 즉 어미불상의 장중 수려한 미는 그 불상이 바로 백제시대 불상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이 목각어영의 별명을 「야나기노미에」라 하거니와 그것은 이 절에 보관된 고려시대 해동학허의 불고(일본 중요 미술품 지정)의 이름이「양류관음상」(136×75㎝)이라 돼 있는 사실과 견주어서도 뜻깊은 일이다.

<한인과의 숱한 인연들>
천초사와 한인들과의 특별한 인연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결코 끊겼다고는 할 수 없다.
대정12년(1923)의 이른바 관동대지진 때, 한인 학살사건의 중심지가 다름 아닌 이 천초가 있는 태동구(당시는 천초구)였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 동경시내에서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도 바로 이 천초사 주변이라는 사실도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2차 대전 말기 B-29의 공습으로 폐허가 됐던 자리에 옛날모습 그대로의 대가람이 모두 중수 완공된 것은 73년9월. 온갖 현대적 시설을 갖춘 사무소를 찾아가 취재「팀」을 맞아 이 절의 서무교화담당 전중소덕 스님은 먼저 이 절에 비치된 단가 명종에 실린 천씨·박씨·김씨 등 많은 한국인 신도들의 명단을 보여주면서 이 절과 한인들 사이에 얽힌 숱한 사연들을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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