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상)베트남 화평교섭의 내막은 이렇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키신저」미 국무장관은 작년1월 월남평화협정을 체결한데 이어 금년 1월「이스라엘」-「이집트」군 격리협정을, 그리고 5월에는「골란」고원군 격리문제를 타결시켜 세계의 각광을 받았다. 세계의 난제를 한 손에 떠맡아 초인적인 조정작업을 해낸「키신저」외교의 비밀은 무엇인가? 미국외교문제 이간지「포린·플리시」여름호에 실린「태드·슐츠」기자의『월남휴전협정의 내막-「키신저」는 어떻게 했나』라는 논문에서 이 비밀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월남타결 당시「뉴요크·타임스」지의 국무성 출입 기자로「키신저」와 친했던「슐츠」기자는 비밀의「베일」속에 숨겨져 있는 일련의 복잡한 사건을 추적, 가장 완전한 설명을 가하고 또 이 문제를 한층 깊이 파고들어 이 협정이 남긴 가능성과 함정에 대한 분석도 하고 있다. 다음은 이 논문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주>
월남휴전협정 및 그 이후의 사태를 초래한 72년과 73년의 비밀교섭의 배경에 감추어진 놀랄 만한 외교적 활동이 전체적으로 공표된 일은 없다. 공표한다면「닉슨」정권에 유익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입수된 자료로 보면 언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부분적으로 재현할 수는 있게 되었다.
월남협정에 대한 미국정부의 해석을 밝혀 주는 국무성 비밀문서 및 미국이 교섭에 임한 입장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이 사태를 재현해 보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은 월맹에 대해 지금까지 거의 이행되지 않은 일련의 비밀약속을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월남군 지원임무를 띠고 월남에 주재하는 모든 미국민간인을 1년 안에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또「크메르」에 무기수송을 금지한다는 휴전협정의 일부 군사조항을 왜곡 해석하도록 월남정부에 교사했다.
▲미국은 월맹의 경제재건을 위해「하노이」를 원조하기로 했었다.
73년3월말 협정에 대한 원칙적 합의는 보았지만 공산측의 휴전위반을 이유로 미국은 이것을 보류했다. 이 협정의 합의 및 보류사실은 모두 비밀에 붙여졌다.

<대월맹 경원약속은 「공약」>
▲진정한 의미에서 휴전교섭의 전환점은「파리」에서가 아니라「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 즉「키신저」가 72년4월말「모스크바」를 비밀 방문했을 때「키신저」는 월남에서 월남·「베트콩」·중립파의 3자 선거위원회를 제안, 소련 측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소련과 중공의 외교적인 도움을 입는 대신 휴전 전에「티우」대통령을 제거하라는「하노이」측 요구를 취소할 의사를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키신저」는 72년의 교섭과정 대부분에 대한 외교적 움직임을「사이공」정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그해 8월까지만 해도 미국대통령 선거 뒤 월맹에 침공할 준비를 갖추라고「티우」를 고무했다. 그러다가 10월에「키신저」는 미국이 월맹군의 월남철수를 요구하지 않고 있음을「리우」에 알렸다.
▲평화교섭을 둘러싼 비밀외교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상대방이건 우방이건 교묘하게 조종하는 수완을「키신저」가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 수완은 월남문제해결의 열쇠는 미국의 소련 및 중공과의 화해에 있다는「키신저」의 신념을 바탕으로 발휘된 것이었다. 거꾸로 말하면「키신저」는 장기적으로 보아 월남을 해결한 뒤라야 화해가 달성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밖에「키신저」외교를 지배한 2개의 사고방식이 있다. 하나는 빠르든 늦든 미국은 월남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종적인 격렬한 전투 뒤에 교섭의 돌파구가 열린다는 신념이었다.「키신저」외교는 한편으로는「티우」·「론·놀」, 다른 편에서 월맹·소련·중공이 항상 평형을 취하지 않는 상태에 둔다는 것을 노리고 있다. 「닉슨」대통령도 자신의 안보문제특별보좌관이 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과정을 통해 볼 때「키신저」외교는 단판에 성패를 지는「스타일」이었다.
한발 잘못 디디면「키신저」의 모든 외교적 구상은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붕괴의 위기에 가까이 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키신저」는 모든 사람에게서 비밀을 지킴으로써만 비로소 활동할 수가 있었다. 「키신저」는 69년8월 이후부터 월맹과 비밀교섭을 해 왔다. 처음 월맹과 접촉을 한 사람은「프랑스」의 전 외교관「장·상토니」였다.

<「모스크바」방간서 실마리>
그의 주선으로「키신저」와 월맹평화교섭 수석대표「수안·루이」와의 첫 회담은 69년8월4일「파리」의「리보리」가에 있는「상트니」의「아파트」에서 실현되었다.
미국의 입장은 월맹군의 완전철수, 월남평화회의 개최와 결부된 인지전역에서 현장휴전을 통해야만 월남평화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맹은 월남에 그들의 군대가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섭으로는 전혀 해결될 수 없었다. 월맹의 입장은 미군의 전면철수와「티우」의 배제였다.
교섭에 약간의 밝은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71년에 들어서였다. 5월31일「키신저」는「레·둑·토」와 만나기 위해 다시「파리」에 날아와 새로운 비밀제안을 했다.
비밀회담은 보통 이렇게 진행되었다. 「키신저」와 그의 막료는 아침에「메릴랜드」주「앤드루즈」공군기지에서 공군VIP전용「보잉」707「제트」여객기를 타고 출발, 저녁에「오를레앙」근처의「아포르」공군기지에 도착한다.
여기서 두 사람은「프랑스」공군조종사가 조종하는 소형「제트」여객기로 갈아타고「파리」교외「비라크브레」군용공항까지 가서 미국대사관 승용차로「파리」시내의 비밀「아파트」로 갔다. 71년5월31일에 제안한 평화안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미국이 휴전실현과 미군포로 석방을 맞바꾸고 전 미군 철수기한을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상호살수』를 강조해 온 미국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키신저」가 띄운 최초의 관측기구였는지도 모른다. 즉「하노이」측이「티우」배제를 고집하지 않으면 미국은 근본적인 양보를 한다는 암시였다.
다음 회담은「하노이」측이 이 제안을 검토한 뒤 6월26일에 열렸다. 「토」는 9개 항목으로 된「하노이」측의 비밀제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인도지나 문제전반을 대상으로 하고「티우」의 배제를 포함한 것이었다.
「닉슨」정부의 5월31일자 제안으로 미국이 조급한 해결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은 양보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월맹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키신저」는 북경방문에 의해 월남평화교섭을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할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키신저」는 주은래 중공수상과 회담한 직후인 7월12일「파리」에 돌아 왔던 것이다. 「키신저」가 8월16일 휴대하고「파리」로 간 비밀제안의 내용은 분쟁해결에 관한 포괄적인 협정이 성립한 뒤 9개월 안에 미국은 미군 및 모든 우방군대를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미국은 월맹을 포함하여 전쟁으로 파괴된 인도지나 복구를 위해 원조한다는 제안을 처음으로 했다. 「키신저」는 미묘한 말투로 월맹이 평화조건으로「티우」추방이란 주장을 포기하면 미국이 월맹군의 철수를 고집하지 않겠다고「레·둑·토」에게 통고했다.

<외교움직임 월남엔 비밀로>
그러나 월맹은 10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둔「사이공」의 정치적 혼란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보고「티우」추방에 도박을 걸었다. 이 결과 9월13일의 비밀회담에서 월맹은「키신저」의 제안을 거부했다.
「키신저」는 10월11일 다시 조건을 완화한 새로운 평화제안을 월맹측에 전달했다. 신제안에 의하면 협정체결 뒤 6개월 안에 모든 미군 및 우방군대를 철수하고 모든 포로를 교환하고 인도지나 전역에 휴전을 실시하고 월남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티우」와「후옹」부통령은 선거실시 1개월 전에 사임하고 새로운 선거에는 민족해방전선을 포함한 월남의 모든 정치세력을 대표하는『독립된 기관』이 관리한다는 계획이었다.
여기에도 월맹군의 철수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키신저」는 5월31일에 내보인 미끼를 분명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도 월맹은 서서히 호전적인 태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 증거의 하나로 월맹은「키신저」와 다시 얼굴을 맞대려 하지 않았다. 「레·둑·토」는 병을 핑계로「키신저」와의 회담을 회피했다. 그리고 월맹은 군비를 대폭 강화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