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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안중근 의사를 감히 테러리스트로 부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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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채인택
논설위원

얼마 전 서울 만리동의 보덕사에서 박삼중(72) 스님을 만났다. 40년 이상 사형수 구명과 교화 활동을 벌였고 안중근(1879~1910) 의사 숭모 사업에도 관여한 분이다. 스님은 “최근 일본 관방장관이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불러 너무도 분한 마음이 들었다”며 안 의사의 참모습을 알려주는 자료와 일화를 공개했다.

 자료는 조선 침략을 획책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사살한 직후의 안 의사 사진을 담은 엽서였다. 무명지를 단지한 왼손을 앞으로 내민 모습이다. 사진 아래에는 ‘이토 공을 암살한 안중근. 한인은 고래로 암살의 맹약을 할 때 무명지를 절단하는 구관(옛 풍습)이 있다’는 글이 일본어로 적혀 있다. 이 엽서가 발행 직후 날개 돋친 듯 팔리자 안 의사를 영웅시하는 풍조가 번질까 봐 두려워한 일제가 인쇄를 중단했다고 한다.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대의 속에 대담하게 거사하고, 당당히 잡힌 안 의사를 추앙하는 분위기가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은 물론 심지어 일본인 사이에서도 퍼졌다는 증거라고 했다.

 스님은 “옥중의 안 의사는 57점이 넘는 붓글씨를 남겼다”며 “40년 이상 관련 사업을 해온 경험상 사형수가 옥중에서 당당히 붓글씨를 써서 나눠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존경심 말고는 달리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독립(獨立)’이란 휘호도 남겼다. 1910년 2월 뤼순 감옥의 간수 시타라 마사오(說樂正雄)에게 준 것이다. 시타라는 이를 들고 일본으로 돌아가 여생을 안 의사를 흠모하며 살았으며 세상을 떠나면서 조카인 시타라 마사즈미(說樂正純)에게 물려줬다. 스님이 몇 년 전 히로시마현 간센지(願船寺) 주지인 조카를 찾아가 “부르는 대로 값을 쳐주거나 원하는 한국의 서예 작품과 교환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주지는 “당시 안 의사는 작은아버지에게 ‘이토를 사살한 이유가 내 나라의 독립이란 걸 일본에 가서 널리 알려라’라며 이를 선물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일본에 있어야 한다”고 거절 이유를 밝혔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자신을 취조한 뤼순 법원의 검찰관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에게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운다)’라는 글을 써줬다. 자신을 감시해온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을 선물했다. 조국을 넘보는 침략자에게는 총탄을 날렸지만 자기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공직자와 군인에게는 오히려 이런 격려의 글까지 써준 것이다. 동양 평화 사상을 주창한 위대한 사상가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채인택 논설위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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