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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환의 시대공감] 대학가 커피숍의 화려한 공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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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호 31면

유럽에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차와 초콜릿뿐만 아니라 커피가 부유층 집안의 일상음료가 되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에 따르면 그 무렵에 어느 비단상인의 마부가 처음으로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18세기 첫 10년이 지나기 전에 런던에는 3000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군데군데 들어섰다.

커피하우스에는 단골손님이 끼리끼리 모여들었다. 어느 곳에서는 지식인과 귀족이 어울려 예술과 문학을 이야기하고, 다른 곳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모여 고대와 근대에 대해 토론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신흥 부르주아들이 주가의 오르내림을 예측하고 보험에 대해 정보를 나누었다. 오래지 않아 커피하우스는 그 이전에는 입에 담을 수 없던 정치문제의 토론장이 되었다. 커피하우스는 그리스의 광장(agora)이 되기도 하고, 로마의 원로회의장이 되기도 하고, 영국의 의회가 되기도 했다. 밀턴(J. Milton)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이들의 사상도 커피하우스에서 영글었다.

팸플릿이나 신문이 발달하자 커피하우스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인쇄매체에 난 내용이 커피하우스의 의제(agenda)에 오르고, 난상토론을 거친 그 의제는 정련된 상태로 인쇄매체에 실렸다. 초기에 커피하우스는 문학 이야기가 꽃피는 화원(花園)이었지만, 뒤에는 뜨거운 정치 담론이 활활 타는 화로(火爐)였다. 커피하우스와 인쇄매체는 그렇게 하여 함께 공론장을 만들었고, 그 공론장은 마침내 구체제를 허물고 근대 시민사회를 열었다.

커피하우스가 남성의 본거지였다면 살롱은 여성의 거점이었다. 여성들도 살롱에서 초기에는 예술과 문학을 논했지만, 화제는 곧 경제나 정치문제로 옮겨갔다. 상류사회의 귀부인이 드나드는 살롱에는 남성 귀족이나 관료, 새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가 드나들었다. 살롱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개혁론이 뿌리를 내려갔다.

우리나라에서 커피하우스가 대중화한 것은 동란이 끝난 뒤부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은 예쁜 레지가 차 심부름을 하는 다방에 죽치고 앉아 사업 궁리를 했다. 손님은 저마다 사장이었고, 다방은 만인의 사무실이었으며, 레지는 모든 사장의 공동 비서였다. 바로 그런 다방에서 우리 자본주의의 움이 돋았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예전 다방과는 분위기가 다른 미국식 커피숍이 부쩍 늘었다. 팔걸이 의자에 앉아 레지에게 추파를 던지곤 하던 옛날의 정취는 물론 사라졌다. 노장층 가운데 레지에게 진한 농담을 해도 성희롱으로 몰릴 염려가 없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지만, 밝고 툭 트인 공간의 현대성을 높이 사는 이가 오히려 더 많다.

우리 대학생들은 커피숍에서 책 읽기를 즐긴다. 미국 대학가에서는 30, 40년 전부터 그랬다. 집중도가 떨어질 법도 하지만, 친구도 만나고 책도 읽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라면 굳이 못마땅해할 이유가 없다.

기성세대는 그런 공연한 걱정보다는 자괴감부터 느껴야 한다. 왜인가? 며칠 전에 대학가에 있는 커피숍에 들렀다가 나는 갑자기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다음 세기의 혁명을 논해야 할 커피숍 공간에서 젊은 대학생들은 하나같이 취직걱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도 오라는 데가 없다는 이야기, 면접에서 낙방한 사실을 부모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장래가 불안해 이성 친구 만나기가 겁이 난다는 이야기,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좌절하고 절망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그들의 화살은 바깥을 겨냥했다. 한 학생이 지난 대선에서 눈 딱 감고 박근혜 후보를 찍었는데 대통령이 되자 청년 취업문제에 너무 소극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학생은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정쟁만 일삼는다며 야당을 성토했다. 한 학생은 청년 문제가 자식들 문제인데 어른들은 세대 간의 갈등에만 과민반응을 보인다고 투덜댔다.

유럽에서 커피하우스는 근대 시민사회를 여는 공론장이 되었다. 거기서 여론이 나오고 민주주의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은 다방에 모여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키웠다. 거기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 싹텄다. 그러나 요즘 커피숍에서 우리 젊은 학생들은 커피에다 불안과 불만, 그리고 좌절을 타서 마시고 있다. 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다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 시대의 이 화려한 공허를 어찌할 것인가? 젊은이들의 사랑과 꿈, 야망과 혁명이 꿈틀대는 커피숍을 보고 싶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고려대 신방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전남대고려대 교수,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한국언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소설 『담징』(201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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