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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섭일 특파원 아라비아 반도 종단기|「킹·파이잘」의 왕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킹·파이잘」의 왕궁은 하나의 요새와 같았다. 왕궁수비대가 현대식 무장으로 첩첩이 싸고 있을 뿐 아니라 왕궁의 촬영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석유파동을 계기로「파이잘」의 위세와 콧대가 더 높아졌다고 느껴진 탓인가,「리야드」에 들어서면 보통 때면 예사롭게 보일 일마저 한결 돋보인다.
당연스레 보일 왕실수비대의 모양이 근엄하고 아주 삼엄하게 보이는 것도 이런 탓일 것이다. 상황이야 어쨌든 기자라는 직업의식이 고개를 들고「파이잘」왕을 한번 직접 보고싶은 생각이 든다. 허황한 생각인줄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나 하는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중인 한국사절단 중 장예준 상공부장관 등 5명의 접견이 결정되자 이 기회가 유일한 것이라고 판단, 의전관과 접촉을 시작했다.
『사진이라도 찍도록 해달라』는 요청에『의전실장에게 이야기 해보겠다.
거부될 경우에는 왕궁 안에 못 들어온다』는 말에 실망했으나 다시 접촉,
『일단 따라와도 좋다. 그러나 승낙이 안 나면 나가주어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러 마침내 「파이잘」왕을 가까이서 보고 사진도 찍을 기회를 갖게되었다.
황토색 담장이 기나긴「파이잘」왕궁은「리야드」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원이 지켜서 있는 정문에서 2백50m거리의 현관에 이르는 정원 안에도 삼엄한 경비망이 쳐있었다.
기화 요초가 곱게 다듬어져 있는 정원 소로마다 새빨간 소방차 같은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 군이었다. 붉은 「카피트」가 깔린 대기실서 기다리는 동안 의전관이『왕의 촬영만은 허용되었다』고 알러 주었다. 현관 안 「로비」에는 경찰모를 쓴 「카키」복의 경비원이 보였고 2층 계단에는 「베레」모의 경비병이 기관단총을 겨누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기실에 서성댄지 잠시 후 반대쪽의 자동문이 열리며 「파이잘」왕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머리에는 금띠를 드리운 「코트라」를 쓰고 모시와 비슷한 천으로 만든 「망토」에「아라비안십십」이라 불리는 가죽「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석유황제「파이잘」-. 그는 근세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절대군주로서 이 사막 왕국에 군림하고 있다. 절대군주이긴 하지만「파이잘」왕은 그의 형이었던 낭비벽이 심한 전「사우드」왕과 비교되어 곧잘 명군으로 추앙된다. 64년 취임이래 왕실의 개인 수입이던 석유수입을 국고로 돌려 재정을 확고히 한 점이라든가 노예제도를 폐지 한 것 등은 그의 10년간의 치적중 백미로 꼽힌다.
「사우디아라비아」권력은 부족 대표-왕족-왕이라는 단계로 집중되어 있다. 각 부족의 토후가 행정관청의 요직에 안배되고 이들을 3명의 주자가 통제하고 있다. 부수상·내상·국방상의 자리에 앉은 3명의 왕자는 부왕「파이잘」의 절대권력행사를 보좌하며 왕위계승을 위한 경쟁 상태에 놓여 있다는 토막지식이 그를 바라보는 동안 오락가락했다.
「아와드」상공상이 일행을 하나하나 소개할 때마다「파이잘」왕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할 뿐 고개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악수할 때마다『사라말리쿰』이라고 기원하듯 말했는데 이는 『당신에게 평화를!』이란「아랍」어라고 통역이 귀띔해 주었다.
그의 두 눈은「아라비아」인들이『요술하는 눈』이라고 부르는 그대로 빛나고 있었으며 입술 아래위로 약간 길게 검은 수염을 갖고있었다.
「파이잘」왕이 인사할 때 고개를 까딱하지 않은 것은 「아랍」인의 통례라 했다. 존경의 대상은「알라」뿐이며 그 밖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이슬람」철학에 다라 이 나라에는 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왕실전속 「무비· 맨」이 영사기만 돌렸고 기자가 몇「커트」를 계속 누를 때까지 왕은 무표정 그대로였다. 인사가 끝난 후 왕은 긴의자에 앉아 우리대표단과 촬영을 위해「포즈」를 취해주었다.「파이잘」왕과 한국대표단이 접견하는 동안 작은 유리잔에 홍차 같은 차를 황금 주전자로 따라주는데 어떻게 뜨거운지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차를 마신 뒤 그대로 들고 있으면 계속 따라주는데 사양하려면 찻잔을 좌우로 약간 돌려야 된다는 것은 한참만에 안 지식.
「파이잘」왕은 한국대표단이 예물로 송학을 수놓은 병풍을 내놓으며『송학은 동양철학에서 장수를 뜻한다』고 설명하자 흡족한 표정을 나타냈다. 9분 동안 접견하며「파이잘」왕이 입을 연 것은 주로 한국대표단의 이야기를 듣다가『한국은 우리의 친구나라이며 무궁한 번영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말을 할 때였다.
접견이 끝나자 왕은 처음 모습을 나타낼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서서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라곤 눈에 띄지 않았고 왕궁을 나선 것은 왕궁에 들어선지 꼭25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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