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경기지사 징크스' 같은 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정치권엔 진리처럼 유통되는 속설이 많다. 정치를 많이 안다는 사람일수록 그런 속설을 굳게 신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고정관념을 번번이 뛰어넘는다. 한때 “대선 직전 해에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후보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말이 떠돌았다. 박찬종·이회창·고건의 사례를 보면 그럴듯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런 소리는 쑥 들어갔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이 유리하다”는 건 속설을 넘어 거의 자연법칙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은 딴판이었다.

 그렇다면 ‘경기지사 징크스’는 어떨까? 경기지사 출신들은 대권 도전이 힘들다는 속설 말이다. 1997년 이인제의 실패와 2007년 손학규의 좌절이 만들어낸 이 속설은 외부보다 경기도 내부에서 더 정설로 통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징크스를 믿는 사람들은 서울시장은 조그만 일을 해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데, 경기지사는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겨도 언론이 관심을 안 갖는다고 투덜댄다. 또 서울은 좁은 공간에 인구가 밀집돼 있어 시장에 대한 주목도가 높지만, 경기도는 면적이 광활하고 인구가 분산돼 지사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티가 안 난다고 한탄한다.

 최근 김문수 경기지사가 “도지사는 8년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며 지방선거 불출마와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김 지사가 도지사 3선에 도전한다고 해서 그가 새누리당 대권 후보에서 빠지는 일은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출마한다고 해서 민주당 대권 주자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굳이 김 지사가 경기지사를 그만두고 당으로 복귀하겠다는 것은 다분히 ‘경기지사 징크스’를 의식한 측면이 큰 것 같다. 차기 대선이 3년도 더 남았는데 더 이상 ‘시골’에서 썩으면 안 되고 빨리 ‘서울’로 가야 한다는 초조감마저 느껴진다.

 글쎄 정말로 경기지사가 그것밖에 안 되는 자리일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선거는 물론 대통령 선거지만 그 다음엔 경기지사 선거다. 경기도(1223만 명) 인구는 서울(1014만 명)보다 200만 명이나 더 많다. 국회의원(52명)도 서울(48명)보다 많다. 올해 예산은 15조9906억원으로 서울(24조4133억원)보단 적지만 다른 광역단체보다는 월등하다. 경기지사가 서울시장에 비하면 성에 안 찰 수 있어도 다른 광역단체장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다. 이런 풍부한 정치적 자원을 갖고도 대권 도전에 불리하다면 경남의 홍준표나 충남의 안희정은 굶어 죽으란 얘기밖에 안 된다.

 과거 사례에 비춰보면 경기지사에게 필요한 건 당의 화려한 타이틀이 아니라 차분히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인 듯하다. 이인제·손학규 모두 조금 더 참지 못해 가시밭길을 자초했다. 여의도에 있다고 지지율이 저절로 오르진 않는다. 손학규는 지사를 그만둔 뒤 당 대표를 두 번이나 했어도 지지율은 그대로다. 경기지사의 대권 도전 실패는 본인 탓이지 자리 탓이 아니다. ‘경기지사 징크스’는 언젠간 무너질 속설에 불과하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