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첩자「길라우메」가 체포되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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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베를린=엄효현 특파원】「브란트」의 측근에서 서독의 극비정책을 빼돌린 것으로 보이는「길라우메」는 그가 정치망명이라는 구실로 서독으로 넘어올 때 이미 꼬리 잡힐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서독방첩기관의 기록에 56년 서독에 스며든 간첩 중 G라는 머리글자를 가진 인물이 F란 인물과 연락하기로 돼있었다는 사실을 포착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F란 인물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가 l8년이 지난 요즈음에야「헤세」지방의「푀르스터」란 인물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길라우메」는 56년「망명」후 사민당에 입당하여 충실하게 일했다. 69년 총선 때에는 착실한 태도를 보여「브란트」의 눈에 들게 했다.「브란트」자신이 그를 측근에 두려고 결정하게 되자 서독 정보부에서 그의 신원조사가 진행됐다. 결론은『불투명한 점이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는 것이었다.
신원조사 때「길라우메」는 자신이 동독의 잡지사에서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일하다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서독으로 탈출했노라고「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다만 자신이「나치」당원이었다는 전력 하나만은 그대로 덮어두었다.
실은 그는 이 전역이 동독에서 탄로되어 체포된 뒤 동독에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처벌받는 대신「스파이」가 되겠다고 협상에 응했던 것이다.
「길라우메」가「브란트」의 주위를 맴돌게 되자「브란트」의 한 팔로 비유되던 중심적인 브레인「에곤 바르」비서실장이 우선 경계의 빛을 띠었다.
「길라우메」의「스파이」혐의가 뚜렷해진 것은 73년 5월, 서독정보 부에서「브란트」수상에게 이 사실이 통보되었다. 이때부터「길라우메」에 대한 감시가 시작됐다. 밤낮없이 40명의 감시원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길라우메」가 「스파이」라는 사실의 확증은 올 봄「프랑스」「리비에라」휴가 때였다. 「길라우메」감시를 위해 1백명의 요원이 뒤를 따랐다.「프랑스」의 정보기관도「길라우메」미행작전에 끼어 들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빠짐없이 체크, 중부 프랑스에서 동독「스파이」와 접촉하는 것이 포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서독의 잡지들은 프랑스 정보기관은 이미 오래 전부터「길라우메」가「스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프랑스 정보기관은 동독국립은행의 비밀예금구좌 중 하나가「브란트」주변의 한 개인을 위해 개설되어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정보기관은 접촉하고 있는 동독의 한 은행원으로부터「브란트」주위의 어느 인물에게 지급되는 급료가 저금되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받아「길라우메」가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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