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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악백년 제36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20년대 YMCA를 무대로 활약하던 경성의 음악가는 기악에 홍난파와 필자정도였고 그외에는 모두 성악이었다. 원로급인 김인식 김형준, 「우에노」를 나온 한기왕 윤심덕, 무리고 이화학당출신인 윤심성 박인덕 김활난 임북세 윤성덕 김합나등이었다.
당시의 음악회「프로그램」을보면 분명해지는네 1920년12월 동경음악학교동창회 주최로 「베토벤」 탄생 150주년기념음악회라는 것이 종로기독청년회관에서 열렸었다.
이때 출연한 음악가는 「피아노」 독탄에 필자와 한기왕, 「피아노」연탄에 김합나 윤성덕, 「바이얼린」 독주에 홍난파, 고음독창 (소프라노) 에 윤심덕과 한기주, 보음독창 (바리톤) 에 윤기성으로 되어있다.
윤심원의 언니며 이화학당대학과 제2회졸업생인 윤심성, 그리고 윤심덕과 비숫한 연북인 김활난이 그당시 음악회에서 독창을 많이 했는데 이들은 음악을 전공으로 하지는 않았다.
또 김인식 김형준등이 정규음악가가 아니고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인 동시에 최초의「소프라노」는 한기왕 윤심덕 두사람이라 볼수 있다.
우리나라 성악가의 계보를 따진다면 한기왕 윤심덕 다음에 임북세 윤성덕 안기영 현제명 계인선 정훈모 채선섭, 그음이 이상춘 이유선 이인범등으로 이어진다고 할수 있다.
한기왕 윤심덕은 동경 「우에노」음악학교사범과를 나왔는데 원래 사범과는 중학교 음악선생이되는「찬스」였다. 또 한기주는 잠시 교편을 잡다 출가해서 집안에 들어앉았고, 윤심덕은 유행가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본격적 성악가는 30년대에 활약한「테너」안기영 현제명, 「소프라노」정동모 채선섭부터라고 할수 있겠다.
「소프라노」 한기왕 (현73세) 는 서울에서 음악을 이해할만한 원만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녀를 졸업한 다음 처음에는 의과에 가려다가 음악을전공했는데 그당시 딸을 동경유학까지 보내는것을 허락할정도면 굉장한 신식 집안이었다.
한기왕는 충독부 관비생으로 윤심덕 김문보 박환병과 같이「우에노」사범과에 들어가 성악을 전공하고「피아노」도 곁들여서 했다. 그는 귀국후 윤심혜과 함께 유악회의「스타」로 활약했었다.
한기왕와 윤심덕은 같은「소프라노」 지만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한기왕는 얌전하고, 동양적이고 키가보통인데비해 윤심덕은 쾌활하고, 남성적이고 키가 컸다. 그래서 무대에서는 한기왕보다 윤심덕이 횔씬 인기를 끌었다.
이때 한기주는 모교인 경기고여에서 2년간 교편을 잡다가 당시 연전교수이던 백상규써와 결혼해서 주로 집안에 들어앉았었다.
20년대 조선악단의 여왕이었고 『사의찬미』 와 현해탄의 정사로 유명한「소프라노」윤심덕은 마침 나의 처와 숭의여학교 동기동창생이라 한때 우리집에도 와서 살았을 정도로가깜게 지냈다.
윤심덕은 초창기의 많은 음악가를 배출해낸 평양에서 1897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윤호병, 어머니는 김씨였고, 형제는 딸3형제에 아들하나로 맨위가 심성, 그다음이심덕·성덕·기성이었다.
4남매는 모두 음악에 남다른 재질이 있었고 언니 심성은 김활난보다 이화학당 대학, 과3년 선배로 무야말로 신여성이었다.
동생 성덕도 역시 이화학당을 나왔고 나중에 미국에서 성악을 전공해서 귀국후에는 이전교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막내 기성은 연전을 나와 역시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했고「바리톤」 으로 오랫동안 활약하다 6·25때 횡사하고 말았다.
윤심덕의 집안은 평양에서 이인선 이유선혐제 집과 바로 이웃이었다. 이유선이 태어날때 바로 아기를 받은 사람이 윤심덕의 어머니였으며 윤심덕은 그 이유선을 업어 기로기도 했다고 한다.
그당시 윤심덕의 아버지는 이웃에서 술주정꾼으로 소문나있었다. 장보러 오는 사람들은 시장바닥에서 윤아무개를 만날까봐 겁을낼 정도였다는데 한번 예수교를 믿고나서부터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온집안 사람들이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가난한 집안출신의 윤심덕의4남때가 모두 신교육을 받을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교덕이었다. 선교사가 이들을 도와 거의 기르다시피 했으며 학비까지 대주어 교육을 마치게 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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