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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처의 편지에 비친 북한 실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괴에 간 일본인 처들의 참상이 드디어 일본사회에서도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이름도 기구한 「일본인 처 자유왕래 실현 운동본부」라는 동경의 한 민간단체가 북송 일본인 처의 가족들로부터 수집한 8통의 편지가 공개된 것이 그 계기라 전한다. 편지의 내용은 산모가 쌀밥을 먹지 못해 젖이 안나온다는 얘기. 43세에 이미 완전히 백발이 되었다는 얘기, 두부와 생선은 볼 수도 없다는 얘기, 돈은 소용없으니 헌옷가지를 보내 달라는 얘기 등 애절한 호소로 넘쳐 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네살짜리 꼬마가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데 그것도 그림책 같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학생들의 흉내만 내고』있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이처럼 가혹하고 애틋한 북녘 하늘 밑의 나날을 알리는 하소연이 김일성 독재체제 하에서의 일상생활의 전모를 그려주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닳아빠진 술어가 그래도 어떤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번에 공개된 8통의 편지를 두고 하는 말이 될 것이다.
한국의 관·민의 끈질긴 반대와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인도주의」라는 거짓된 허울 밑에서 현대판 강제 「엑서더스」(퇴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재일 교포의 북송이 강행된 것은 1959년이래 15년간에 걸쳐서였다. 이 기간에 재일 교포인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간 일본여성이 6천명이나 된다. 따라서 이번에 공개된 8통의 편지란 15년간에 걸친 6천 여성의 무거운 침묵을 뚫고 새어 나온 겨우 한 모퉁이의 소리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일본인처자유왕래」 실현운동 본부의 책임자조차도 그 언니가 1960년에 북으로 간 이후 14년 동안 단 한통의 편지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실증이 된다. 그뿐 아니라 이 8통의 편지조차 『할 얘기가 많으나 쓸 수가 없다』고 그 필자들은 밝히고 있다. 너무나 자명한 얘기다.
일찌기 재일 교포 북송을 일본정부에 대하여 그처럼 강력히 반대했던 우리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딸려간 북송 일본인 처들의 이같은 어려운 처지 앞에서 『그것보라니까…』하고 고소하게 생각할 한국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오직 세상물정에 어둡고 분별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일본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한국인 남편을 그래도 끝까지 따르겠다는 기특한 충절 때문에 북괴의 정략에 넘어간 이들 여성들에게 우리는 깊은 인간적인 동정과 측은의 정을 금할 수 없을 뿐이다.
염로가 있다면 그것은 이들 철없고 힘없는 여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정부와 일본의 언론에 대해서이다. 공산 독재 치하의 일상이 어떻다는 것을 소상하게 알고 있을 일본의 외무성과 언론기관은 그들이 쥐고 있는 정보를 감추고 숨기거나 또는 왜곡함으로써 북송된 재일 교포와 그들의 일본인 처를 불행의 구렁텅이에 밀어 뜨린 일에 공모하였다는 비난을 극키 어려울 것이다.
뿐더러 그 이후에도 일본의 언론인들은 북괴의 공식 초청으로 평양에 가 환대를 받고 돌아와서는 지옥을 천국처럼 보도 찬양하는 짓들을 계속해왔다. 그러한 배경에서 생각한다면 이번에 공개된 8통의 편지는 일본의 여론에 대하여 일본인의 손으로 쓰여지고 전달된 북괴의 실정에 관한 최초의 진실보도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들도 같이 북송 일본인 처의 자유왕래가 실현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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