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진산」의 부음을 듣고|이상철 <전 국회 부의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병상에서 진산의 부음을 들으니 내 갈 길을 제가 왜 먼저 가느냐는 아픔이 가슴을 저민다. 그가 가장 필요한 이 어려운 시기에 진산은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으리라.
작년 12월 그렇게도 직강해 보이던 모습이 그와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때 진산은 무척 폭음을 했다. 『진산, 건강에 주의해야지』하는 내 얘기에 『걱정 말게, 석운. 몸에는 자신 있어』하던 그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스스로 『함수 작전』이라 부르던 정치 책략과 어떤 일이고 해야 한다 생각하면 강행하던 그의 「스타일」 때문에 그에겐 좋지 않은 세평이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 악평은 대개 정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었다.
그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마다 내겐 고하 (송진우씨 아호)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일제 때 신문 간화회에서 세상일을 하려면 말이 많다는 내 말을 듣고 『큰일하는 사람이 욕 안 먹고 어찌 큰일을 하느냐』던 고하의 얘기다.
세평이 어떻든간에 진산은 드문 인재요, 인물이다. 한국 정치에서 차지해 온 위치나 야당을 이끌어 온 역량이 그렇다.
그를 얘기할 때 세상에서 떠도는 이 소리 저 얘기를 괘념하다간 끝이 없다. 정치하는 사람 치고 욕 안 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릇 정치인이라면 자기 할 일을 부끄럼 없이 해 나가면서 역사의 평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일부에선 진산과 나를 민주당 신구파의 쌍벽이라지만 그건 진실성이 없는 말이다. 우리는 때로 입장을 달리했으나 실제로 부딪친 일은 없었다.
진산과의 첫 대면은 부산 피난 시절 창낭댁에서였다. 그후 한 동안 내가 원내, 그가 원외로 엇갈려 접촉이 갖지 않았고 본격적인 정치적 접촉을 갖게 되기는 5대 국회 때부터였다.
민주당 신·구파 대립에서 진산은 비교적 독특한 입장에 섰다. 구파의 인물이었고 결국 구파의 참모 총장이 됐으나 신 파와도 깊은 접촉을 가졌다.
민주당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 회담에도 당론파는 달리 비교적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5·16후 정치 활동이 재개될 때 변영태씨를 추대하려다 실패한 뒤 길을 달리했으나 그와 나는 정치를 보는 생각이 비슷했다.
우양을 추대하던 신정당과 해위를 밀던 민정당이 국민의 당으로 합당을 모색할 때 우리는 각기 상대편의 대표였다.
그러나 진산과 나는 모두 당론과는 달리 대통령 후보 보다 당수에 더 관심을 쏟았다. 민정당 대표였던 진산은 우양 대통령 후보에 해위 당수를, 나는 해위 대통령 후보에 우양 당수를 추진했다.
승산엔 확신이 없고 이긴다해도 2년 사이 헌법을 손질하고 다시 선거 치르도록 돼 있으니 당권을 잡자는게 피차의 속셈이었다.
이런 우리의 생각은 당내에서 거센 비판을 받아 배신자로 몰렸다. 진산이 해위 (윤보선 아호)측 이상한 눈초리를 받게 된 게 이때부터였다는 기억이다.
한·일 회담에 대한 태도도 비슷했다. 우리와 일본이 언제까지 원수로 살 수 없는 이상 국교 정상화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란 생각이었다.
이런 그의 현실적 태도와 편향, 그리고 앞장서 궂은 일을 밀고 가던 그의 성격이 「사꾸라」란 세평의 까닭인 듯 싶다.
어차피 이제 진산은 갔다. 이제까지 진산 없는 야당, 진산 없는 신민당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심각히 생각해야 할 시기다. 한국 유일 야당의 정통을 지켜 온 신민당에는 경험과 연력을 쌓아 온 인재가 없지 않다. 진산이 갔다해서 파국을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서로 다투다가도 결국엔 힘을 합해 온 야당의 전통을 신민당은 수호해야 한다. 야당과 같이 살다 간 진산의 영전에서 옷깃을 여며 전통 야당의 앞길을 다짐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