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완전한 모습 드러낸 신석기 시대 움집|한강변 암사동 선사 유적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4, 5천년 전 빗살문 토기 시대의 최대 취락지인 서울 성동구 암사동 한강가의 모래언덕을 발굴 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은 당시의 움집 규모를 상세히 밝혀 주는 한 주거지를 완전히 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한병삼 고고 담당관이 이끄는 발굴 조사반은 지낸 8일에 착수, 2백평 넓이 속에서 4개의 움집터를 찾아냈는데 그중 한 터가 불에 탄 채로 오랜 세월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온 까닭에 신석기시대 중기의 주거 양식을 복원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즉 기둥의 위치와 굵기 및 당시 주요 가재 도구이던 토기·맷돌·돌도끼·어망추·화살촉 등을 고스란히 간수하고 있어 옛 생활을 환히 들여다보게 됐는데, 이 같은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완전한 발굴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집은 당시 지표에서 1m쯤 파고 들어가 지붕을 덮은 움집(수혈식 주거). 평면으로 보면 둥글어 직경5m이며 그 한 귀에는 부속 저장고까지 시설했음이 학인 되고 있다.
움 내부의 기둥은 방형(사방2.5m)으로 6개를 세웠고 나무 굵기가 10cm정도. 응집된 숯의 흔적으로 보아 기둥 길이가 2m로 추경되며 출입구에는 판판한 계단석까지 놓였음이 완연하다.
화재 후에 지표면이 흐트러져 서까래의 쓰임새는 분명치 않지만 대체로 삿갓 모양의 지붕이 기둥에 받혀 지표에서 좀 떠 있었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집 속 한복판에는 돌로 울을 만들어 불을 피운 네모진 화덕(노지·50×60cm)이 예대로 마련돼 있고 기둥 주위엔 타제석기와 깨어진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맷돌로 쓰던 판석은 추녀 밑 부위에 두었는데 저장고 안의 수장품은 앞으로 발굴 진척에 따라 드러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토기는 질흙에다 운모와 곱돌 가루를 섞어 구운 원저의 항아리들(하부가 뾰족해 원추형)로서 표면엔 빗살로 그은 듯한 줄무늬가 새겨졌다.
이 주거지에선 신석기 시대 말기에 속하는 무문토기는 물론 마제 석기나 그밖에 농경구가 전혀 발견되지 않아 농경 이전의 주로 강을 중심한 어로로 생활하던 때라 해석되고 있다.
이 빗살문 토기 시대의 토층 위에는 무문토기 층이 겹쳐 있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그 위에 다시 백제 초기의 토기가 발견되는 토설이 두껍게 덮여 있다.
이번의 경우 백제 토기층이 2m. 이런 사실은 이 지역이 2, 3천년을 거치는 장기간의 집단 주거지였음을 시사한다.
한병삼 고고 담당관은 이곳 암사동 일대가 이미 확인된 신석기 유적 중 최대 규모의 것임을 지적, 이의 보존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암사동 강둑의 최북단 산에서부터 남으로 풍남리 토성(사적11호)에 이르는 모래 둔덕은 적어도 삼국시대 초기에 축조된 토성. 그런데 모래 둑은 북반이 비교적 온전한 편이고 광진교 인근은 주택이 밀집돼 있다.
이들 유적은 50여년 전부터 알려져 있지만 근년 모래 채취의 성행으로 마구 파괴돼 71년이래 발굴 작업이 계속돼 오는 셈.
그 동안 3, 4차의 소규모 발굴 작업에서 수십 채의 신석기시대 집터가 발견 됐으나 유적의 보존은 수수방관의 상태다.
이 지역은 포전 및 무허가 움집이 들어서서 날로 파괴하는 실정인 까닭에 박물관 최순우 연구실장은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해 신석기시대 유적공원으로 꾸민다면 사회 교육과 관광 면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전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종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