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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력 잃어 가는 금융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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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제 금융기관의 갖은 사고는 제도 및 규정의 개정이나 단속강화 정도로 근절될 단계는 넘은 것 같다. 그만큼 대형화되고 만연된 것이다. 책임자와 여 행원이 공모하여 고객예금 9천만 원을 빼돌린 최근의 농협 사고가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대로 은행 공신력의 밑바탕이 되어야 할 「금융도」와 금융인의 긍지가 붕괴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회 부조리 속에서 금융계만이 독야청청 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지 모른다. 그러나 금융 기관은 남의 돈을 맡는 곳이고 또 신용질서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은행 공신력의 실추는 그만큼 심각한 사태가 되는 것이다. 특히 최근 들어 『났다 하면 은행 사고』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은행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고객예금 빼돌리기·부정대출·수표위조·담보부실·신용장을 이용한 수출금융사고 등 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이 다 나타나고 있다.
금융계는 71년 금융 정상화 파동을 한번 호되게 치른바 있다. 금융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 은행 간부급의 3분의 1가량이 숙청되고 새로운 자세 확립이 거듭 다짐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경과는 오히려 금융비리가 가속된 느낌이다. 여기엔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있다. 우선 영업규모 및 거래영역의 확대에 따라 사고의 빈도는 늘게 마련이고 금융인에 대한 부정의 외부적 유인도 그만큼 강하다. 제도 면에서도 잘못이 있다.
수출지상주의에 의한 특혜적인 금융지원은 최근의 빈번한 거액 무역금융사고의 큰 요인이 됐다. 날로 대형화·복잡화해 가는 상거래에 대응할 만큼 금융제도면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농협 사고가 나자 남 재무부 장관은 부랴부랴 은행장 회의를 소집, 「사고방지 대책」이란 것을 시달했는데 그 중엔 ①기업신용도를 정기적으로 평가, 등급별 분류를 할 것 ②신용거래가 나쁜 은행의 신용장을 취급치 않을 것 ③주1회 이상 자체감사를 실시할 것 ④동일인이 한자리에 오래 있지 않도록 할 것 등 제도적인 시정 지시사항이 많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그 동안 수차에 걸쳐 지시 강조된 바 있다. 아무리 신용장「체크」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해도 수출을 위한 금융지원을 신성불가침시하는 정책기조가 바로 수출금융 부정의 소지가 되는 것이다.
또 금융인이 직장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도록 대우도 후하지 못하다. 물론 은행 봉급이 우리 나라 전체적인 수준에 비해선 낮다고 할 수 없지만 현금을 취급하는 특수성에 상응할 만큼은 못 된다.
최근 은행원들이 대거 기업체로 빠지는 것도 이런데 이유가 있다. 그러나 봉급이 낮다는 것과 제도면의 미비가 은행사고의 전부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금융풍조 자체가 더 문제다. 그 동안 금융계는 철저한 관치 아래 무책임한 상태를 노정해 왔다. 경영·인사에 자율성을 상실하고 상업「베이스」가 통하질 않았다. 관치금융은 금융도를 마비시켰다.
사고가 나도 하급자만 책임을 지고 영업·인사 등에 외부의 영향력이 너무 강했다. 여기에 영합하여 적극적인 금융비리를 조장한 금융인 스스로의 잘못도 크다.
결국 최근의 은행사고는 근원적으로 사회 부조리·관치금융·무책임 경영·금융도의 타락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은행사고 근절의 방향도 근본적인 금융풍조의 개혁에서 출발해야 한다. 은행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도 책임 안 지면서 아무나 간섭하는 상태는 조속히 종식돼야 금융 정상화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최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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