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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의 상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2차 대전 직전, 「루마니아」의 가난한 소작농「모리츠」는 잘못되어 유태인이라 기록된다. 『공문서에 잘못이 있을 리가 없다. 고로「모리츠」는 유태인이다』.
항의하는 그에게 당국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결국 유대인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된다. 요행히 이곳을 탈주하자 이번에는『적국「루마니아」인』이라고 체포되어 독일로 끌려간다.
『기계는 규율을 어기지 않는 고로 완전한 노동자다. 인간은 완전한 노동자일 수가 없다. 고로 인간은 기계를 본떠서 일해야 한다.』-그는 이런 철칙을 지키는 공장에 갇혀 일하게 된다.
여기서 한「나치」장교는「모리츠」가 틀림없이 순수한「게르만」족의 후손이라 여기고, 「나치」친위대원으로 만든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부리던「프랑스」노무자들과 함께 연합군 점령지구로 탈정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범죄자라 하여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종전을 맞는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되어 처자와 재회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후로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유태인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지 13년 후의 일이다.
그는 드디어「루마니아」의 고향을 그리면서 평화스러운 하룻밤을 아내와 함께 보낸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날 새벽에 또 다른 소환장을 받는다.
3차 대전이 일어나서 서구에 있는 모든 동구인들이 감금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18시간 밖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게오르규」는 당초에<25시>를「루마니아」어로 썼다. 그러나 처음으로 세계에 발표되기는「프랑스」번역판에 의해서였다. 「루마니아」의「정치」가 이런 작품의 발표를 허용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게오르규」자신도 결국은 모국을 떠나야만 했다고「모리츠」의 고난은 국제정치의 틈새에 낀 약소민족의 슬픈 숙명을 상징하고도 있다. 그러나「게오르규」의<25시>란, 사실은 서구문명에 대한 고발서였던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20세기란 기계·기술만능의 병독에 걸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세계다. 그것은 마지막 시간 다음에 오는 시간, 「메시아」의 강림으로도 구제될 수 없는 시간, 곧 25시의 세계인 것이다. 지난 20일 우리나라를 찾은「게오르규」는 그런 25시는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25시의 상황은 30년 후의 지금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의 상황을 이겨내는 길은 오직 신앙의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얘기일까. 그러고 보면 그가 한국을 찾은 데에는 뭔가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한국에 대한 꿈을 품어 왔었다는 것이다.
그 꿈은『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다듬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를 맞는 오늘의 한국은 어쩌면『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한국의 시계는 과연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일는지, 25시의 상황을 뛰어 넘을 가능성을 혹은 우리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는지 살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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