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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킹」 유행의 세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들의 전통적인 예절과 풍습은 「내·외」의 엄격한 구별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내외의 구별이 작금 여러 가지 차원에서 스러져 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내외 한다」는 말은 원래 부녀자가 외간 남자와 바로 얼굴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이같은 내외를 위해서 예전에는 나들이하는 아낙네들은 장옷을 돌러 쓰기도 했고 일상 생활의 가옥 구조조차 안방과 사랑방이 구별되고 있었다. 안방은 아낙네들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방은 바깥양반들을 위해서 따로 있었다.
동시에 안방은 어린이의 세계요, 사랑방은 어른의 세계이기도 했다. 안방은 자칭의 사랑을, 그리고 사랑방은 엄친의 권위를 각각 상징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과 「사랑」은 「사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의 분간을 배우는 출발이기도 했다. 우리들에겐 내외가 있다는 것이 곧 전통적 질서의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외간의 질서가 지금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해방이자 동시에 여성의 해방이기도 했던 8·15이후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의 원리는 그것이 디디고 설 발판을 잃고 말았다. 더우기 재래의 한옥 대신 적산 가옥·양옥·판자집이 즐비 하는 오늘의 도시 가옥에는 이미 안과 사랑의 공간적 구별도 없어지고 말았다. 여자들의 복식은 눈만 남기고 오름을 가리던 장옷 대신, 이젠 허벅다리까지 노출하는 「미니·스커트」가 판을 치게 됐다. 도대체 남녀의 외양조차 그 구별이 희미해져만 간다. 장발한 남자, 단발한 여자, 남자 요리사, 여자 축구단, 꽃무늬「샤쓰」를 입은 남자, 바지를 입은 여자….
남녀의 구별뿐만 아니라, 어른과 어린이의 구별도 희미해져 간다. 「텔리비젼」을 통해서 세정 인심 다 알아차리고 있는 「어른 같은 어린이」, 나이는 먹었어도 도무지 위엄도 치신도 없는 「어린이 같은 어른」. 그야말로 오늘의 세계엔 안방·사랑방의 구별도 없고, 남자·여자의 구별도 없고, 어른·어린애의 구별도 없이, 철없는 어른, 조숙한 어린이들만이 늘어간다는 서구 과학자들의 진단이 그럴싸하게 들어맞는 것도 같다.
사사로운 안방에서가 아니라 남들의 눈이 있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개구장이 어린이가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은 성년의 남녀가 대낮에 알몸뚱이를 노출하여 거리를 달린다는 「스트리킹」이 한국에도 상륙했다는 사회적 배경은 지금 내외·남녀·장유·공사·주야의 일체 구별을 잃어버린 현대의 무질서가 내놓는 최후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이미 문명과 야만의 분간조차 사라져버리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질서와 무질서,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그토록 얄팍하고 취약한 것인가를 우리가 배우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인류는 바로 우리가 숨쉬며 살고 있는 20세기의 현대 속에서 인간의 성악을 덮고 있는 문명의 피막이 얼마나 엷은 것인가 하는 것을 「히틀러」 유태인 대량 학살과 그밖의 여러 나라에서의 대학살 사건 등을 통하여 소름이 끼치도록 보여주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발전하는 긴 역정에 대해서 문명에서 야만으로 역퇴전하는 길은 그야말로 순식간으로 족하다. 「아우슈비츠」의 살인 「스위치」를 누르는 손, 백화대로에서 「팬티」를 벗는 손처럼 그것은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벗어버린 알몸뚱이가 달려갈 행선지는 어디란 말인가. 『나체는 춥다. 그러니 옷을 입지 않으면 안된다』는 현자의 시구가 새삼 반추되는 한심한 작금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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