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5)제10화 고구려의 유풍 남긴 팔호 타구|제3장 동북지방의 한적 문화탐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암강 교수가 수집해 놓은 풍부한 사진과 문헌자료들을 통해 알아본 타구의 역사는 체육사 전공자가 아니라도 흥미진진한 것이 있다.

<「페르샤」전성기 때 창안>
그에 의하면 타구의 역사는 동서양 문화교류의 표본이며,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긴 내력을 가졌다.
발해국을 통해서 일본에 건너와 팔호에 정착한 기마타구는 물론, 오늘날 미국·영국 등 서양 제국에서 성행되는「폴로」(Polo) 경기도 그 발상지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기원전 5∼6세기의「페르샤」로 귀착된다.
이 때,「페르샤」의「키루스」대왕(Kyrus The Great, 재위기간 BC559∼530)은 군사 역사상 처음으로 오늘날의 창기병과 같은 기마 부대를 편성, 중앙「아시아」전역을 제압한 사람인데, 그가 바로 이 기마병들의 무술훈련을 위해 창안해 낸 것이 가죽 공을 마상에서 장대로 치면서 쏜살같이 말을 달리게 하는 경기, 즉 기마타구였던 것.
이러한「페르샤」의 타구는 그 뒤 오랫동안 그곳 궁정놀이의 형태로 계승되어 오다가 「마호메드」교도들의 정복에 의해 이 나라가 멸망할 때 (641) 까지 지속됐다.
특히「페르샤」의 전성시대인「사산」(Sasan) 왕조 (3세기) 에 이르러서는 오늘날 서양의「폴로」경기와 비슷한「룰」이 정해져 서민들 사이에서도 유행되는 국민적「스포츠」가 되었다.

<『아라비언 야화』에도>
알다시피,「폐르샤」는 고래로 동서 무역로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호조건을 갖춘 나라였기 때문에 여기서 발 상한 타구경기가 동서문화교류의 진전에 따라 동과 서로 널리 퍼지게 됐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 타고 공 굴리기 경기를 하는 타구가 얼마나 성행했던가는 저 유명한「아라비언·나이트」에도 나타나 있다.
한「페르샤」왕이 불치의 병에 걸려, 회생의 묘방을 찾고 있었는데, 누군가로부터 타구경기를 해보라고 권유받아 그렇게 했더니 완쾌되었다는 얘기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한편, 이「폐르샤」와 바로 인접해있는「시리아」·「이라크」(옛날에는「메소포타미아」라 불린 세계 3대 문명발상지의 하나)등지에도 이 타구의 역사를 말하는 많은 유물들이 현존한다. 이 지역일대는 7세기께「이슬람」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문명의 황금시대가 전개되었는데, 그 수도「다마스커스」의 주궁 근처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타구경기장이 건설되어 왕후·귀족들이 연일 이 놀이에 열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구국영웅「알·라시드」786∼809)가 말 타고 타구경기에서 용명을 떨치는 장면은 얼마 전 우리 나라에서 상영된 영화장면에도 나오는 얘기다.

<이집트도 궁중놀이로>
타구경기는 이보다 좀 늦게「이집트」에도 전해져 이곳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궁중놀이의 하나였었다. 9세기께「트룬」왕(868∼883)이「카이로」에 세운 웅장한 궁궐 곁에는 역시 호화찬란한 타구경기장이 병설돼 있었으며 13∼14세기 이 나라를 중흥시킨「바이바스」1세 (1206∼1277)의「마메르크」왕조에서는 왕 자신이 타구의 명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한다.
그밖에도 비잔틴 제국(5세기), 인도(13세기)의 타구경기가 그림과 조각에 그려져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놀이의 범 세계적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영국의 국기가 되다시피 한「폴로」경기가 옛「실크·로드」의 일각「아삼」지방(인도북부「티베트」에 인접한 영국 다의 재배지)에 주둔(1859)하기 시작했던 영국 제10 기병연대(속칭「벵골」기병대)의 병사들로부터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이곳 주민들은 19세기까지도 조상들로부터 전승돼 내려온 타구놀이를 지켜왔던 것인데 영국병사들이 이걸 보고 그 흉내를 낸 것이「폴로」라는 것이다.
일본에 전해진 타구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3세기께 중국에도 이 경기가 수입됐다. 한나라 조식(192∼232)의『명도편조자건집 백마편』에는 이 놀이의 시초가 헌제(189∼220) 때부터라고 명기 돼 있고, 그밖에도 그 때 이미 타구놀이에 관한 상세한 규칙 등이 언급돼 있다.
세계문화사가 가리켜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때 이미「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간의 각종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어 타구를 포함한 동서양의 문물이 장안∼감숙∼돈황∼「파미르」고원∼「이란」사이에 활발히 오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암파강좌 세계역사 제6권』소재 우전명씨 논문「동서문화의 교류」를 함께 참조할 것·435∼462PP).

<당에선 고시과목으로>
당나라 때에 이르면 태종(626∼649)이 장안성의 궁궐 안에 서역 각국에 본받은 타구경기장을 건설케 했으며 특히 현종(712∼757)은 이 경기를 문과시험의 고시과목으로까지 파했다 한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의 타구의 시초는 앞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중국을 통해서가 아니고, 발해 국을 통한 것이었다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쏟게 한다.
일본에서의 타구는 처음에는 발 아닌 도보로써 하는 이른바「가찌다뀨」, 즉 고구려의 축국을 본받은 것이요, 또 처음에는 그 놀이의 형태로 역시 정월의 궁중놀이 행사로서 행해지다가 평안조 이후 무사계급의 대두와 더불어서 처음으로 기마타구로 변해 갔다.
일본의 상 고대 역사를 기록했다는『일본서기』(제24권) 뿐만 아니라 상대풍속과 민중생활을 읊은 노래들을 모은『만엽집』을 보면 일본에 타구를 전한 것이 명백히 신귀 4넌 (724) 발해 사 때부터였다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 고구려·신라·백제 등 3국이 정립하여, 서로 패권을 겨루고 있던 무렵,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이 상무적인 경기를 우선은 풍류놀이로서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계속>

<차 례>

<「프를로그 심층발굴의 의미>
제1화 선묘녀의 비련과 의상대사
제1장 자랑스런「귀화인」의 후예들
제2화 주인박사의 직손 아도홍문씨
제3화 고려신사 59대 궁사 고려징웅씨
제4화 살마소의 명도공 14대 심수관씨
제2강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제5화 북해도 한인위령탑의「엘레지」
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간
제7화 신진도의성녀「오다·줄리아」
제8화 포로학자 정희득의 애화
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 행적기

<제3장 동북지방의 한적 문화탐방>
제10화 고구려의 유풍 남긴<팔호타구>
제11화 등기마을에서 쏟아져나은 고려동전얘기
제12화 추전 미인과 북청 미인
제13화 신석항에 서린 은수천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