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새 검찰팀의 첫번째 과제로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이 제기했던 국정원 불법 도청 의혹사건을 지시했다.
취임 후 첫번째 수사 주문이다. 개혁적 국정원장 인선과 국정원 개혁방안을 거의 마무리했고, 극심한 진통 끝에 검찰팀이 재정비된 직후다. 때문에 盧대통령이 김대중(金大中.DJ) 정권이 남겨둔 짐과 부담을 말끔히 벗어던질 다목적 포석으로 이 사건을 선택한 게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盧대통령은 이날 "국가기관의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준 문제"라며 관련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했다.
盧대통령은 대선 직전에는 "현 DJ 정부 아래서 저질러진 비리는 엄정하게 처리할 것"이라며 "국가기관의 신뢰를 바로세우거나 또는 구태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점에서 당선되면 도청 문제는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공약했었다.
즉 국정원이 도청을 했다면 국가기관의 신뢰를 떨어뜨린 것이고, 한나라당이 조작된 폭로를 했다면 '구태정치'로 역시 청산 대상이라는 논리다.
문희상(文喜相)비서실장은 17일 "모든 권력기관의 신뢰를 세우고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게 盧대통령의 통치철학 "이라고 했다.
국내정치 사찰을 없애는 등 국정원의 전면적 기능 개편을 앞둔 盧대통령으로서는 만일 도청 사실이 드러날 경우 국정원 개혁 드라이브의 훌륭한 명분을 얻게 된다. 한나라당의 조작이라면 야당의 도덕성에는 적잖은 타격이 올 수 있다. 향후 대여(對與) 폭로공세를 차단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독립검찰'의 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공적자금 수사.SK수사 등과 달리 도청 수사는 경제에 큰 부담이 없다는 점도 盧대통령의 선택을 수월하게 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수사 과정이 정국에 미칠 파장은 결코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불법 도청 의혹을 폭로한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 등 한나라당 당직자들이 대거 소환될 경우 야당 측의 거센 반발이 있을 수 있다.
盧대통령은 "국민이 납득하는 수준의 예의를 갖춰 한나라당 의원들도 조사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이 같은 발언이 특정 정파를 겨냥했다는 인상을 줄 경우 한나라당은 초반부터 대립각을 세울 수 있다.
이런 형평성을 의식한 듯 盧대통령은 1999년 6월과 8월께 측근인 A씨.Y씨에게 각각 2억원과 5천만원이 건네졌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사건도 정치적 고려없이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송경희(宋敬熙)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나라종금 관련 부분을 뺐다.
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