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회 3·1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늦추위 속에서 또 다시 3·1절을 맞으며 55년 전의 그날과, 오늘의 상황을 생각하면 우선 형언키 어려운 감회가 앞지른다.
전세기말부터 열강의 각축이 이 은둔의 반도에서 계속되다가 드디어 일본에 강제로 병합 당한지 10년만에 우리는 자진하여 일대 민족적 시련을 겪음으로써 민족혼동의 새로운 지표를 세우게 되었으니 이 한가지만으로도 그 의의는 굉장한 것이다. 물론 문호개방 이후에도 약간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밖에서 가해지는 힘의 반작용이 이처럼 뚜렷하고 줄기차게 큰 매듭을 이루어 오늘도 우리의 맥박 속을 흐르고 있기로는 이보다 더한 일이 없다.
따라서 어느 모로나 이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존속하는 한, 영원한 횃불이 되어 타오르리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 해두고 싶다.
흔히 역사에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에서 어떤 뜻을 찾으려고 한다. 사실 뜻을 찾지 못한다면 그 역사는 이미 죽은 것으로, 적어도 오늘을 위한, 내일을 향한 삶에 아무 도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고 처지가 바뀜에 따라 어떤 역사적 사건을 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져 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민족의 통치하에서도 분열된 일이 없던 쓰라림을 근 30년 동안이나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찍이 단일민족으로서의 형성을 본 뒤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살아오던 터에 지금은 큰 이변을 겪고 있다. 남-북으로 갈린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다시 뭉치는데는 우리의 뜻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한다면, 아무리 국제이세가 바뀌어 강대국의 힘이 우리를 통일로 이끌더라도 우리에게 자주적인 통일에의 의지가 없다면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처럼 마련되었던 대화의 기회마저 암운이 드리워진 작금의 형세는 우리 마음을 다시없이 어둡게 만들고 있거니와 우리는 이 마당에서 북괴의 만행을 지탄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하루 속히 북한의 동포와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그러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또 한가지는 일본과의 관계이다. 우리가 그 통치하에 있던 36년간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해방 후에 국교를 맺은 다음에 오늘에 이르는 관계도 결코 정상적이며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다. 과거 일제침략의 악몽을 잊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배타적 폐쇄적으로 지낼 것은 아니지만, 경제 협력이라는 미명아래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지각없는 행동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다시 가슴이 써늘해 진다. 그리고 감히 매국행위에 가까운 것인 줄을 알면서도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몰염치한 무리에게는 민족의 이름으로 어떤 제재를 가해야할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한다.
어떤 역사적 교훈이든 이를 올바로 살릴 경우에만 뜻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우리는 몇 번 되새겨도 모자라는 처지에 놓여 있다. 민족의 통일도 그것이요, 일본과의 관계도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북한동포를 해방하고, 일본에의 의존에서 벗어나는 그날까지, 3·1절이란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주는 단순한 국경일이 아니라, 큰 정신적인 부채로서 남지 않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