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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5)<제자 박순천>|<제35화>「정치여성」반세기(4)-박순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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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네부인들은 나를 「순천댁」이라고 불러주기는 했으나 『시집을 갔던 여자라면 왜 살쩍밀이를 안했느냐』고 수근대는 모양이었다. 살쩍밀이란 옛날에 처녀들이 시집을 가게되면 이마의 잔머리를 모두 뽑아 반듯하게 만드는 일종의 치장법이다. 겁이 난 봉선씨의 올케 윤수기 여사는 내 머리를 뽑자고 했다. 할수 없이 살쩍을 뽑기로 하고 머리칼 몇 개를 뽑아보니 어찌나 아픈지 「차라리 감옥에 가면 갔지 머리는 못뽑겠다』고 족집게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내 살쩍밀이를 하진 않았으나 동네부인들은 뻔히 내가 「만세꾼」인줄 알면서도 모르는체 눈을 감아주었다.
이래서 마산사람들은 칠원의 나에게로 연락할 때「석천댁앞」이라고 쓰게 되었다. 그후 일본으로 유학간 후에도 나는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주변에서 「순천댁」으로 연락했고 나도 신분을 감추기 위해 부모님이 명이 길라고 지어주신 박명달이라는 이름대신 박순천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름 얘기를 쓰고 나니 또 한가지 재미있는 기억이 떠오른다. 자유당정권에 맞서 선거유세를 벌이고 다니던 시절의 얘기이다. 해공 신익희 선생·장면 선생과 함께 우리는 바로 그 순천에 들르게 되었다. 바쁜 「스케줄」속에 마침 하루 쉬는 날이 생겼는데 그곳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해 한마디만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조무래기 꼬마들이 운동장에 하나가득 모인 앞에서 해공 선생은 순천이라는 내 이름 생각을 하셨는지 『너희들 깜짝 놀라면 「이키」하지? 내 이름은 「익희다』라고 느닷없이 이름 얘기를 한마디하고는 내려오셨다.
아이들이 웃고 야단이 나자 다음에 단에 오른 장면선생은 『나는 이름이 「장면」이라 학교다닐 때 아이들이 「자장면, 자장면」하고 놀렸단다』하고 내려오셨다.
이렇게 되어 나는 순천에 가서 내 이름 얘기를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우리아버지가 순천군수를 지내다가 그곳에서 딸을 낳자 이름을 순천이라 지었다는 헛소문도 있지만,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내 이름이 순천이 되었다고 설명하자 아이들은 또 『와아』하고 웃었다. 지치고 피로한 선거유세의 강행군 속에 우리는 이렇게 동심으로 돌아가 한바탕 웃었었다.
칠원에서 소박맞고 온 젊은 새댁 노릇을 하며 한여름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나는 마루에 앉아 있다가 광주리장수 세 사람이 들어서기에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방물장수 아낙네들은 마루에 광주리를 내려놓으며 머리에 쓴 수건들을 벗었는데 자세히 보니 나의 제자들이었다.
나를 오빠 댁에 숨어있게 해준 최봉선이 박봉희 이수학과 함께 변장을 하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반가와 부등켜안고 한바탕 울었고, 나는 그만 더 이상 숨어사는 나날을 견딜 수가 없어져서 저녁을 먹자 학생들과 함께 마산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학교기숙사에 들어서자 학생들은 나를 잡고 초상난 듯 울어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기숙사 마루 밑에는 나의 동정을 살피러온 한국인 형사가 숨어있었는데 하도 여자들이 울어대는 바람에 잡으러 나서지를 못하고 살그머니 빠져나가 다른 형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울음을 그치고 마산형무소 위에 있던 학생 집(이수학의 집)으로 옮겼기 때문에 결국 울음소리에 약했던 그 형사는 나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삯바느질로 외딸을 공부시키며 근근 살고 있던 이수학의 어머니는 두말없이 나를 숨겨 주고 두세달 동안이나 보살펴 주었다.
9월이 되었을 때 나는 마산교회의 목사따님으로 동경유학에서 여름방학동안 돌아와 있던 한소제씨를 만나 같이 동경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배를 타러 부산으로 떠나는 날 마산의 학부형들은 나에게 기생복식을 차려주고 일본으로 갈수 있도록 갖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부산에서 나는 다시 기생차림을 벗고 「기모노」를 입은 후 일녀행세를 하며 관부연락선에 올랐다.
이때 부산에서 만난 사람 이후에 나의 오랜 친구가 된 황신덕씨(현재 중앙여고 이사장)이다. 황신덕씨는 평양준에서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나보다 앞서 동경에 유학가 있었으며 여름방학을 끝내고 일본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시모노세끼」를 거쳐 동경으로 들어갔다.
나는 동경에서 한소제씨의 소개로 상마란 일본사람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상마씨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불교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한 분인데 특히 약소민족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어서 인도의 독립운동가인「부스」씨를 사위로 삼을 정도였다. 내가 처음 들어갔을 때 그 집에는 인도인「부스」와 백계노인이며 장님인 「엘레싱코」가 하숙생으로 있어서 자못 국제적인 분위기였다.
상마씨는 그후 황신덕씨와 내가 「경성가정의숙」을 설립할 때 1만원이라는 거금을 보내줄만큼 한국학생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얼마전 작고한 언론인 진학문씨, 인하대 최승만 총장, 그리고 후에 나의 남편이 된 변선생도 상마댁 하숙생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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