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5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병화! 너 기분 나쁘다 넌 왜

김광주씨만 만나면 좋아하니?"

-박인환

이것은 편운(片雲) 조병화 시인이 명동시절을 돌아보면서 김광주와의 특별한 우정을 드러낸 한마디다. 김광주는 1910년생이고 편운은 1921년생이니 열한살 차이가 있지만 박인환이 시샘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내가 등단하던 60년대 초 만하더라도 선후배가 따로 없고 장르의 구별없이 한 식구가 되던 터라 학연.지연이 없었어도 편운은 내 시를 이뻐해주었다. '신춘시'에 낸 '생활의 강'을 오장환의 '병든서울'보다 좋다고 기를 살려준 일도 그 하나다.

소주값도 없으면서 어쩌다 무교동 '낭만'에 얼굴을 삐죽 내밀면 "저기 맥주 세병 주라"고 내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때마다 편운의 옆에는 김광주가 있었다.

68년 봄 갓 등록을 마친 동화출판사 주간이 된 나는 어느 날 친구인 사장으로 부터 '비호(飛虎)'얘기를 듣는다.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김광주의 무협소설 '비호'를 놓고 큰 출판사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김광주의 '군협지'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비호'의 원고가 민중서관에 들어가 있는데도 잘 나가는 출판사가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책 한권도 내지 못한 출판사의 주간이었지만 나는 '낭만'근처에 있는 금하다방에서 김광주와 편운 두분을 만난다. 그때까지 김광주는 내가 정식 인사도 못드린 사이였다.

편운은 내 앞에서 김광주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 '비호'는 근배한테 줘! 젊은 사람들이 잘 할 거야!"면서. 백발이 성성한 노작가는 뜻밖에도 선선하게 대답했다.

"아무개(어느출판사)가 돈으로 내 두뺨을 마구 때리는데 나는 돈 필요없어. 근배씨에게 주지!" 그 약속은 지켜졌고 김광주는 민중서관 캐비닛에 들어있던 원고다발을 교정볼 것이 있다고 낚아채고는 비호처럼 날라왔었다.

월부판매를 타고 한창 전집붐이 일던 때라 '비호'는 비호같이 팔려나갔다. 외판사들이 제본소에 와서 번호표를 들고 줄을 서 있었다면 어림할 일이다.

김광주는 34년 스물네살 때 '신동아'에 단편 '밤이 걸어갈때'를 발표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36년에는 상하이에서 '민보'등의 기자생활을 했고 해방후 귀국해서는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를 보필하기도 한다.

해방공간에 '민주일보''문화시보''예술조선'의 창간에 참여했고 47년 경향신문 창간과 함께 문화부장에 취임한다. '악야'등 단편과 '성모마리아가 있는 언덕'등 장편을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발표해오다가 중국어에 힘입어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비호'를 낳은 것이다.

나를 만나면 "김래성이 백일장을 하자고 했다"면서 신문연재작가의 재능이 문예지에 단편 쓰는 작가보다 못해서가 아님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다. 그 바래지 않은 문학청년의 기질이 '비호'를 무명출판사에 맡긴 것이리라.

그는 73년 63세를 일기로 편운 등 따르던 술벗들을 남겨두고 먼저 떠났다. 박인환.이봉구.김수영 등과 명동의 '피가로', 퇴계로의 '포엠'에 파이프의 향기를 뿜으며 시의 장강을 풀어내던 편운도 지난 8일 "어머님의 부름으로 와서 어머님의 심부름을 끝내고 간다"는 임종계를 마치고 안성 난실리 편운재 뒷동산으로 모천회귀를 하였다.

러시아 여행을 하던 8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나 죽으면 근배 니가 조시를 읽어 줄거지?" 그 당부 있지 않고 '문학사상'에 나는 조사를 썼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