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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간 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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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앞으로는 50평이 넘는 집은 짓지 못하게 되었다. 건축자재를 아껴 쓰자는 뜻에서다.
1·14조치직후에는 70평이 넘는 집이 호화주택 대접을 받기가 일수였다. 이래서 복덕방에서는 앞으로 50평 이상 70평 미만의 집 값이 가장 크게 뛰리라 내다보았었다. 옛날에는 왕이 아니면 99간이 넘는 집에서는 살지 못했다. 그렇게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록을 뒤져봐도 99간이라는 법적 규제는 없다.
실록에 보면 가사규제가 생긴 것은 세종13년이 처음이었다. 이때 임금은 60간, 왕족은 50간,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문, 그리고 서인은 10간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규제는 했지만 사실은 있으나 마나였다. 왜냐하면 사당이나 부모상전의 가사는 예외였기 때문이다. 또한 집의 기본구조 밖에다 기둥을 곁 붙여 다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문수는 늘려 잡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무역가사를 예외로 쳤다는 사실이다.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의 집은 외국상인 접대의 필요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라, 똑같은 한간이라도 왕은 길이 11척, 왕족은 10척, 2품이상은 9척, 서인 집은 8척이라는 신분에 따른 척수가 세종22년에 따로 정해진 적도 있다.
이처럼 척수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단속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니까 옛날 집의 문수는 실제 면적이라기 보다는 간막이 수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동요에도 나오는『초가3간』도 3간짜리 집의 뜻이 아니라 방 둘에 부엌 하나 짜리 집이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고 본 채에 사랑방, 행랑방 등을 붙여 세우면 10간 짜리 서인집도 얼마든지 크게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한정 넓게 잡을 수도 없는 일이다. 옛날에는 1백이란 수는 하나의 극한치나 다름없었다.
그런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임금 그 이외에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이래서 99간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요새도 집은 마냥 넓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주거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이 넘으면 사치라고 봄직도 하다.
이런 1인당 주거면적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일본 동경은 11평방m. 미국은 36평방m. 영국은27평방m이다.
건축가는 최소한 5평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핵가족 5명의 집은 30평이면 족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은 핵가족제가 아니라 대가족제를 따르는 집들이 많다. 따라서 꼭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서만 50평을 넘는 집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가족생활의 어쩔 수 없는 필요에서 50평이 넘는 사람들이 야단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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