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내 마음의 텃밭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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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빈 텃밭에 호미를 들고 섰습니다. 겨울을 견뎌낸 배추와 무가 노랗고 흰 꽃으로 게으른 사람을 반깁니다. 열무.알타리.봄배추.쑥갓.가지.상추.피망.고추씨를 흩뿌렸습니다. 붓꽃.분꽃.봉숭아.맨드라미.할미꽃.범부채.해바라기씨도 뿌렸습니다. 얼마 후 유채꽃.개복숭아꽃 만발하면 이 친구들 말고도 토란.참나리.머위들도 알아서 고개를 내밀 겁니다. 그러면 텃밭도 정신없이 바빠지겠지요.

얼마 전 서울 사는 친구가 산다는 건 겨울 텃밭 같다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수확의 기쁨은 언제까지나 맛볼 수 있을 거 같지만 겨울이 되면 텃밭도 텅 빈다는 것-. 또 그 텃밭이 텅 빈 채로 겨울을 이겨내기에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또 다른 수확의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러기에 텅 빔이 소중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는 게 늘 겨울 텃밭만 같아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만, 한번쯤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 때 제 마음의 텃밭도 그렇게 비워 봐야겠습니다. 텅 빈 사이, 저도 모르는 어떤 기쁨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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