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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농구를 휩쓴 인간득점 기계 신동파 은퇴선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아시아」의 득점기계 신동파가 농구「코트」를 떠났다. 한국에서는 물론 「아시아」의「스타·플레이어」인 한국대표「팀」의 「백·넘버」7번 신동파(31)가 17년의 선수생활을 청산, 5일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김무현 「코치」를 이어 기은「팀」의 「코치」로 취임했다.
신동파의 돌발적인 은퇴선언은 신이 아직도 왕성한 「플레이어」로 뛸 수 있고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도 앞두고 있는 만큼 한국농구계에서는 큰「쇼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은 은퇴 이유로 『「스타·플레이어」라고 해서 늘 인기의 정상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자랑스런 후배들이 빨리 성장하여 더욱 훌륭한 선수가 많이 배출되려면 「스타」라도 적당한 시기에 물러나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소생각이었다.
더구나 작년 「마닐라」대회에서 너무 무리하여 「알레르기」성 천식으로 좀처럼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김무현 「코치」 등 선배들의 권고대로 이번에 물러 날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신장 1백87cm, 체중 78㎏의 신은 휘문고를 거쳐 연세대·육군·기은소속 선수로 활약하는 동안 68년 「멕시코·올림픽」대회, 69년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70년 5월 제6회 세계남자농구 선수권대회(유고), 8월 「유니버시아드」대회(이탈리아), 12월 제6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71년 10월 제6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동경), 73년 제7회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마닐라) 등 20개의 국제경기를 포함 7백여 회의 국내외경기를 통해 자신의 명성과 한국농구를 크게 떨쳤었다.
그의 공헌은 71년 국민훈장인 석류장과 수십 개의 「트로피」 등으로 표창됐지만 60여년의 한국농구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부각시켜 놓았다.
그는 한국에서도 인기「스타·플레이어」였지만 「아시아」 농구의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있는 「필리핀」 등 「아시아」농구국가에서 더욱 명성을 떨쳤다.
모두 4번의 「필리핀」원정을 통해 「필리핀」에서는 농구기술 개발과정에서 하나의 연구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신은 국내경기에서는 물론 해외 원정경기에서도 평균 40점대를 「마크」했다.
신은 「슛」기술을 『처음 농구를 가르쳐준 신봉호씨(당시 휘문중·고「코치」)로부터 배웠으며 「슛」의 정확도는 연습량과 정비례한다』고 말했다.
신의 최고득점은 휘문고 때 대성북고 경기에서 「마크」한 57점이며, 통산 약 3만점의 득점을 기록했다.
농구경기가 비록 단체경기지만 「팀」의 승부보다는 그의 개인기와 득점에 더욱 높은 관심을 끌어 「필리핀」에서는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신동파 이름을 모르는 국민이 없다』 는 신화적 존재가 되기도 했다.
신동파는 「코트」를 떠나면서 『북한과 대결하여 실력을 과시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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