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필리핀에서(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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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필리핀」에서 태평양전쟁 때의 격전지인 「괌」섬으로 가기 위하여 「마닐라」에서 대형 「점보」747 「팬텀」기에 올랐다. 이 여객기는 최신형으로서 흡사 화려한 극장 내부처럼 으리으리하니 하늘을 나는 궁전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듯 하다. 모두들 성장한 사람들인데 나만이 초라한 낡은 여행 복 차림이라 궁전에 뛰어든 걸인이라고나 할까.

<궁전에 뛰어든 걸인>
그러나 세계를 널리 알려면 여러 나라 사람들과 사귀어야하므로 우리 나라의 예절을 쓰면서 신사 숙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들과 사귀는 것처럼 훌륭한 인간수업이 없기 때문이다. 「니체」의 지적 오만으로서의 고독이나 또는 문학적인 「릴케」의 고독도 이젠 낡은 사고방식이 아닐까. 지금 세계는 국제적인 융화가 무엇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여객기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많이 탔지만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메스티조」인「필리핀」사람의 가족들도 섞여 있었다. 새 희망을 품고 새 나라를 찾아가는데도 왜 흡족하지 못해 할까. 『사람들은 도시에 모이지만 나에겐 죽으러 가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고 노래한「릴케」의 글이 문득 생각났다.
이같이 자기 나라를 떠나야하는 처지가 왜 그런지 서글프게만 보이는 것은 웬 일일까.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자기 조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가야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지금 세계 사람들은「유토피아」를 찾고 있다. 「필리핀」도 나라안이 어지러우니 이상적인 꿈나라를 찾으려는 국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저녁에 떠난 여객기는 1천6백 「마일」이나 떨어진 「괌」섬으로 향했는데, 하늘은 저녁놀로 온통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놀에 물든 뭉게 구름>
「마닐라」에의 낙조가 유명하다고 하더니 놀도 그에 못지 않았다. 저 유명한 「노르웨이」화가「뭉크」의 그림 『절규』속의 불타는 놀도 이 「필리핀」근해 위의 하늘을 물들인 놀의 1만 분의 1도 따를 수가 없을 것 같다. 이 놀빛이 비친 저녁 바다의 빛은 유독 아름다왔다. 어떤 화가도 도저히 그 빛깔을 그림물감으로써는 흉내를 내지 못할 것이다.
흔히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그림에 비유하지만 어찌 이 장엄한 자연미에 견주랴. 영국의 문호 「칼라임」은 자연의 아름다움은 고스란히 신의 옷이라고 하여『의상철학』이란 기막힌 글을 짓지 않았던가 그가 이 「마닐라」의 낙조와 놀을 보았다면 어떻게 평했을까. 『저 놀빛은 깡그리 신의 의상이다』하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단조로운 주황색의 이 놀빛 하나만으로도 하늘이라는 「캔버스」에다 그림을 그리는 자연의 솜씨가 새삼스럽게 놀랍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이곳의 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양으로 맞은편 창문에 가서까지 내다보노라니 이 웬일일까,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는 병풍처럼 뭉게 구름들이 둘러져 있는데 놀빛으로 물들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핑크」빛에 가까운 광채 있는 빛깔인데 아직까지 나는 이렇듯 기막힌 구름의 빛깔을 그림에서도 보지 못했었다.
놀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여객기 창문으로 들어와 여객들의 얼굴까지 붉게 물들일 정도였다. 하도, 황홀해 하니까, 내 모습과 성격이 어울리지 않는지, 옆에 앉은 「메스티조」계 「필리핀」의 아리따운 한 여성은『놀이 그렇듯 기막히셔요? 우락부락하게 생긴 선생님의 얼굴로 봐서는 아름다움에 민감하지 않을 것 같으신 데 그렇듯 놀에 넋을 잃으시니 이상하네요. 우리 「마닐라」사람은 늘 아름다운 낙조며 놀을 보며 사는 걸요』했다.

<일본인 장사꾼 많아>
그러나 이런 축복된 아름다운 놀 속을 달리는 여객기 안에서 세계의 아름다움을 논하기는커녕 상업이야기를 하느라고 송알송알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일본사람이었다.
지금 일본의 경제력은 날로 커가고 있어 장사를 하러 다니는 일본인들이 여객기에 많이 눈에 띄는데 이 여객기에도 일본 사람이 많다. 세계에 내로 라고 쏘다니는 관광객도 많지만 상인도 많다.
놀빛이 얼마나 신비롭고도 크나 큰 마력을 지녔는지 놀 속으로 여객기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놀빛이 더 무르익어 가기를 기다렸다가 창문으로 「카메라」를 바싹대고 「셔터」를 눌렀다. 세계 각국의 명물을 보여주기 위하여 초대되는 국제 친선 여행이 실시되지 않는 한, 이 「필리핀」근해에서 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놀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자면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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