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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김유신, 10세 김춘추에게서 왕의 자질을 보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김유신의 영정. 그는 18세 화랑 때 열 살짜리 김춘추를 만나 즉각 주군임을 알아보고 모셨다. 아무리 고대 왕조시대였다 해도 꼬마였을 춘추의 재목을 한눈에 알아본 유신의 안목이 날카롭다. [사진 권태균]

나라의 흥망성쇠는 사람에게 달렸다. 『삼국사기』 12, ‘경명왕’ 조의 사론에 “『초서(楚書)』에 ‘초나라에는 보배로 삼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한 이를 보배로 삼는다’고 했다”고 나온다. 춘추와 칠성우(七星友)를 가진 신라는 중흥(中興)의 열쇠를 준비했다.

『삼국유사』 2, ‘태종춘추공’ 조에는 태종무열대왕에 대해 “성 중의 물건 값은 베 한 필에 벼 30섬, 혹 50섬이었으니, 백성들은 성대(聖代)라 했다. 『화랑세기』 ‘18세 춘추공’ 조의 찬(贊)에는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군주이며…”로 이어지는 극찬이 나온다. 태종대왕(춘추)은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평을 받았을까?

태종대왕은 한국 역사상 누구보다 준비된 왕이었다. 최근 나타난 『화랑세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춘추는 제29대 왕(재위 654~661)으로 진지왕의 손자다. 『삼국사기』에는 이찬 용춘(또는 용수)과 진평왕의 딸 천명(天明) 부인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화랑세기』에 새로운 내막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춘추는 왕궁에서 출생했고 10년을 궁에서 살았다. 아버지 용수(龍樹)가 천명공주와 혼인해 진평왕의 맏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579년에 왕위에 오른 진평왕에겐 두 동생 진정갈문왕과 진안갈문왕이 있었다. 그런데 삼형제에겐 아들이 없었다. 603년, 진평왕은 왕위 계승자를 정한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 조엔 “대왕(진평왕)은 적자가 없어 용수 전군(殿君,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고 나온다. 그해 춘추가 태어났고, 왕궁에는 오랜만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모 선덕 공주는 춘추를 사랑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 무덤의 비(碑).

궁에서 보낸 10년 … 자신감·당당함의 원천
아버지 용수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 춘추는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한다. 춘추는 왕궁에서 10년간 미래 군주(君主)의 삶을 준비했다. 이 시기 춘추의 가슴속에는 제세(濟世), 즉 세상을 다스릴 군주로서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자라났고 평생 지워질 수 없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후일 당 태종을 만나 당당함을 보여준 배경이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612년, 운명이 흔들렸다. 진평왕이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친자식인 선덕 공주가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했다. 그때 마야 황후(진평왕의 정부인)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대왕은 (천명) 공주(춘추의 어머니)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궁하도록 권했다. 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고 출궁했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 이로써 용수와 천명 공주 그리고 춘추는 새로운 운명을 맞았다.

이모로서 김춘추를 사랑했지만 한때나마 춘추의 대권을 방해했던 선덕여왕.

그런데 궁 밖에서 춘추는 삼한통합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김유신을 만났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에 “용춘공이 (김유신을) 사신(私臣)으로 발탁했다. 유신공은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하고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고 따랐다. 용수공(용춘의 형) 또한 그 아들(춘추)을 맡겼다. 유신공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용수공의 아들(춘추)은 삼한지주(三韓之主)입니다”라고 한 것으로 나온다. ‘삼한지주’의 주(主)는 주인 또는 임금을 뜻한다. 김유신이 왜 춘추에 대해 이런 말을 했을까?

612년, 춘추는 10세, 김유신(595~673)은 18세였다. 요즘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학생과 고등학교 학생 사이. 그런데 당시 진평왕을 중심으로 한 성골 집단에 권력을 이어갈 아들이 없다는 사실과 춘추가 성골왕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김유신은 춘추가 왕궁에서 태어나 왕이 될 훈련을 잘 받았고 성골들이 사라지면 춘추가 왕위계승의 영순위라는 사실을 주목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춘추와 김유신의 특별 관계가 발전했다.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가 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 가동에 들어간 것이다. 『화랑세기』에 “(풍월주, 우두머리 화랑) 18세(대) 춘추공은 우리 무열대왕이다. 얼굴이 백옥 같고 온화한 어투로 말을 잘했다. 커다란 뜻이 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이 치밀하고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이 (춘추를) 위대한 인물로 여겨 군(君)으로 받들고 있었지만 왕(춘추)이 겸양으로 부제(副弟)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하였으나 보종과 염장공이 아직 있었기에 왕(춘추)이 양보하여 기다렸다”고 나온다.

이 관련 기록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18세 유신이 스스로 신(臣)으로 자처하고 10살 춘추를 군(君)으로 받들어 군신(君臣)관계를 가졌다. 신라에서 왕이 아닌 사람의 신하는 사신(私臣)으로 불렸다. 유신을 포함한 칠성우는 사신으로 있다 654년 춘추가 왕이 된 후 신(臣), 즉 왕의 신하가 됐다.

둘째, 612년 화랑도의 우두머리 풍월주가 된 유신은 10세 춘추를 제2인자인 부제로 삼는 파격을 감행했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에 “유신이 춘추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왕자나 전군(殿君)이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나온다. 춘추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낭도의 교육과정을 배우고 또 추종 세력들을 거느리도록 배려한 것이다.

셋째, 풍월주의 지위는 부제에 넘기게 돼 있었으나, 춘추는 일단 보종공과 염장공에 양보하고 기다렸다가 626년 18세(대) 풍월주가 됐다. 춘추의 양보와 기다림을 통해 보종공과 염장공은 칠성우에 들어오게 됐다. 칠성우에는 유신공을 비롯해 모두 진골인 알천공·임종공·술종공·염장공·보종공이 있었다. 이들 칠성우가 아니었다면 춘추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칠성우들과는 인척 관계로 이어져
『삼국사기』 41, ‘김유신’ 전에 642년 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갈 때 춘추가 유신에게 “나는 공과 더불어 동체(同體)로 나라를 위하여 팔과 다리가 되었으니…”라고 나온다. 춘추와 김유신을 포함한 칠성우는 한 몸이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춘추는 군(君), 칠성우는 신(臣) 또는 사신(私臣)이었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춘추는 칠성우와 인척(姻戚) 관계를 맺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유신이 딸 문희를 춘추와 연결시킨 일이다. 그런데 춘추는 문희를 정궁(正宮)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궁부인(正宮夫人)은 보종공의 딸 보라였기 때문이다. 보라는 아름다웠고 춘추와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를 낳아 춘추가 몹시 사랑했다.(『화랑세기』 ‘18세 춘추공’). 춘추와 보라 사이에 출생한 딸이 642년 대야성에서 죽은 고타소였다. 그래서 후일 보라가 아이를 낳다 죽은 뒤에야 문희가 정궁이 될 수 있었다. 칠성우 사이에 얽히고 설킨 중복된 혼인관계가 이들을 하나로 묶는 장치가 됐다.

칠성우는 능력을 달리하며 춘추를 도왔다. 그중 염장공. 『화랑세기』 ‘17 염장공’ 조에 “선덕(여왕)이 즉위하자 조부(調府·조세 거두는 관부)에 들어가 영(令)이 되어 유신과 춘추 양공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자신도 부를 쌓았다”고 한다. 오늘날 잣대론 문제겠지만 그런 게 허용됐던 당시 염장공은 왕위 계승 프로젝트에 실탄을 공급한 것이다.

칠성우는 춘추의 마음도 헤아렸다. 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러 갔을 때 압량주의 군주가 된 김유신은 전투에서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1000명을 죽였다. 김유신은 사자를 보내 백제 장군에게 “우리 군주(주의 장관) 품석과 그 아내 김씨의 뼈가 그대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이제 그대는 품석과 그 아내, 두 사람의 뼈를 보내어 산 여덟 사람과 바꾸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백제는 품석 부부의 뼈를 널에 넣어 신라로 보냈다. 김유신은 백제 여덟 사람을 살려 돌려보냈다(『삼국사기』 41, ‘김유신’).

648년 당나라에 가서 당 태종을 만난 춘추는 동궁(東宮)으로 나온다(『삼국유사』 1, ‘태종춘추공’).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는 ‘동궁’이란 지위는 칠성우 때문에 가능했다.

진덕여왕의 즉위는 춘추를 왕위 계승권자로 만들었다. 647년 1월 비담의 난을 칠성우들이 단결해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세운 후 왕정을 장악했다. 진덕여왕 즉위 직후 알천이 상대등(국무총리)으로 됐다. 그는 김유신과 함께 춘추를 왕으로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임종공은 국력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한 인물이다. 보종공은 화랑도가 받아들이고 있던 신선(神仙) 사상에 정통했으며 의술에도 탁월하여 김유신 등의 병을 고치기도 했다.

칠성우의 아들들도 춘추를 위하여 활동했다. 651년 왕정을 총괄하는 관부로 설치된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인 중시(中侍)는 술종공의 아들 죽지(竹旨)였다. 칠성우의 아들이 행정 관서를 총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후에 자장(慈藏) 율사로 불리게 된 호림공의 아들은 643년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웃 나라의 침해를 진압할 수 있다고 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우도록 건의했으며 탑은 645년 완공됐다. 그 자신은 황룡사 2대 주지가 되었다(『삼국유사』 3, ‘황룡사 9층탑’). 칠성우들은 대를 이어 다양한 면에서 최고의 정치세력으로 활동한 것이다.

647년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춘추와 칠성우는 양보하고 기다리며 준비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이루어진 춘추의 왕위 계승은 칠성우를 양신으로 만들었고, 태종대왕은 성군의 칭호를 갖게 됐으며 신라는 중흥의 길에 들어섰다. 준비된 자만이 미래를 개척하듯 준비된 왕 춘추는 신라 대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이종욱 교수 leejw@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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