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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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대통령은 18일 장장 3시간13분에 걸친 연두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이날 기자들이 제기한 12개항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국내외경제 전반애 관한 그의 소신과 올해 정부의 중점시책에 관하여 설명하고 국민의 협력을 호소했다.
이제는 하나의 연례행사로 굳어진 대통령의 연두기장회견은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우선, 외국과는 달리 국가원수나 정부수반이 국민대표 기관으로서의 국회에 자주 나가, 그때 그때 국정의 대강을 설명하고, 중요한 입법을 요청하는 전통이 없다시피 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연두기자회견이 그에 대신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여론의 대변자로서의 기자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통해서나마 대통령이 주권자인 국민에게 직접 그 소신을 피력하고, 거기 대한 지지와 협조를 바라는 관례를 갖는다는 것은 민주정치의 중요한 요제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으로, 오늘날에 있어서는 흔히 망각되고 있는 국가원수의 제정일치적「리추얼」(제례) 집전 기능이 이러한 기자회견을 통해 어느 정도 부활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고래로 부족국가의 장은 중요한 부족적 행사때마다 제례를 베풀고 그 제주가 됨으로써 부족 기 성원의 단결의 구심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국가에 있어서도 국가원수가 집전하는 여러 의례적 행사는 국가기능의 이같은 본질적 요청에서 나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정례적인 연두기자회견을 갖고, 정중하게 국민앞에 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국민적 단합에 터 잡은 국정운영을 다짐하는데 있어서도 없지 못할 행사라 아니할 수 없다.
전례없이 긴 회견을 통해서 박대통령은 국내정치·경제시책·외교정책·노사협조문제· 학원자유문제·대북한정책 등 광범위에 걸친 새해 시정구상을 밝혔는데, 그 중에는 박대통령 자신과 현정부 수뢰자들이 기왕에도 누차 천명했던 방침을 재확인한 것도 있고, 또 종전에는 듣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말도 있다.
서정쇄신과 관련하여, 공무원들에게『대통령 눈치만 보지말고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한 것, 새마을 운동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불붙고 있는 새마을운동이 외형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한 도시보다 훨씬 더 내용있는 변화』라고 지적한 것, 그리고 이 운동의 성과는 『농촌의 외형적 변모보다 그러한 변모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 것 등은 특히 감명 깊은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날의 기자회견중 국내외를 통해 가장 주목할만한 발언은 그가 북한측을 향해 남북한 불가침협정을 맺자고 한 제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박대통령은 이 남북한불가침협정의 골자로 첫째 남북한이 절대로 무력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만천하에 약속할 것과, 둘째로 상호 내정간섭을 하지 말 것, 그리고 셋째 어떤 경우라도 현 휴전협정의 효력을 존속시길 것 등 세가지 핵심적인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대통령은 이미 작년 6월23일의「평화외교정책선언」에서 남북한이 서로 내정간섭을 하지말고, 상호불가침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따라서 이번 연두기자회견에서의 박대통령의 주장은 그가 이미 6·23선언에서 천명한 남북한불가침협정 체결의 주장을 좀더 명확하게 구체화하여 이를 북한측을 향해 정식으로 제의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70년대 세계의 기본조류는 평화협상과 평화공존이다. 이 기본조류를 바탕으로 해서「유럽」에서는 이미 모든 냉전적 유산을 정리하고, 이른바「전후시대」를 과감히 결산하고 있는 중이다. 냉전의 유산정리와「전후시대」의 결산은「아시아」지역에서도 널리 시도되고 있는데 유독 한반도라 해서 그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73년11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표결 없는 안결』을 가지고 한국문제 해결을 남북한 당사자에게 맡기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런 조건이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제는 주로 우리민족의 의사에 의해서 자주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박대통령의 남북한 불가침협정 제의는 오늘의 세계의 기본조류를 타고 민족단결 원칙에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항구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객과적 요청을 부합시키기 위해 능동적으르 행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박대통령의 상호불가침·상호내정간섭 배제·휴전협정의 효력존속 등 3대 주장이 북한측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면 전쟁은 방지될 것이며, 평화는 유지될 것이다. 그뿐더러 불가침협정의 체결은 남북간의 대화·교류·협력을 촉진하고 평화공존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것이다.
불가침협정체결 제의에 대해서 북한측이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는 물론 미지수에 속한다. 만약에 북한측이 되풀이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진정으로 평화를 공고히 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고 『조선문제는 조선사람들끼리 해결』할 의사가 있고, 또 그것이 진심이라고 한다면 평화를 항구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첫 걸음으로서 불가침조약 체결에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평화공존노자를 가리켜 민족분열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평화통일이라는 이름의 적화통일』노선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보적인 애국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같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요컨대 그들이 아직도 대한민국을 전복할 수 있으리라는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있다는 증거요, 70년대 세계대세의 기본방향을 이해치 못한데서 생겨나는 시대착오적 망상인 것이다.
비록 갈라졌지만 싸움만은 하지말고 평화롭게 살자고 하는 평화공존론은 일단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분단이 자아내는 대립·긴장·고통·희생을 근본적으로 완화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로서는 평화통일에 접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적화통일노선이 결국 유혈참극을 빚어낸다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침략과 전복의 야망을 깨끗이 포기하고 우리의 평화공존 주장에 동조해 오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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