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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결이나 협력이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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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시아」지역에 4강에 의한 다극세력 균형체제가 태동하면서 등장한 두 신흥세력은 일본과 중공이 다. 이 두 나라는 다같이 전통적인 「아시아」의 토착세력으로서 미·소 등 초강대국에 비해 이 지역에 보다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 때문에 이 두 세력간에는 공동 이익점과 이해 상충점을 다같이 지니고 있다. 미·소를 주축으로 한 양극체제가 물러나고 미·소·중공·일본의 4극 체제가 형성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들 두 「아시아」의 거인이 궁극적으로 대결과 협조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아시아」의 장래뿐 아니라 세계정치판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다음은 「홍콩」에서 발간되는 「아시아」지역전문지 「파이스턴·이커노믹·리뷰」의 편집장 「데례크·데이비스」씨가 쓴 이 두 가능성에 대한 예진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주】
중공 주은내 수상의 70년4윌 평양방문은 문혁의 혼란기를 넘긴 중공 외교의 회복기를 획하는 전기였다. 북한에서 주는 중공 외교의 회복기를 획하는 전기였다. 북한에서 주는 중공외교의 한 기조가 될 연설을 통해서 통렬하게 일본을 공박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본의 팽창주의와 군국주의 부활을 비난했으며 일본이 「아시아」전역에 대해서 처음에는 경제적 지배를, 그 다음에는 정치적 지배를 확립하여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로 다시 만들어 버릴 야심을 품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로부터 2년 동안 중공의 관영 「미디어」는 매일갈이 이 주제에 의한 반일선전을 펴 태평양전쟁의 쓰디쓴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일본의 성장하는 경제력과 영향력에 대한 「아시아」제국의 반발을 부채질하였다. 중공의 이와 같은 「캠페인」은 무역과 자본에 대한 대일 의존을, 최근에 쟁취한 독립에 대한신식민주의 위협으로 느끼기 시작한 많은 「아시아」국가들의 감수성에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한국을 위시해서 동남 「아시아」 및 「오스트레일리아」등지에서 일어난 반일 「데모」선동에 중공의 선전 「캠페인」이 큰 작용을 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대의 위협 소라고 엄살>
70년 중반부터 72년 말까지 중공이 취한 새로운 외교 노선은 주로 일본의 도전에 대한 반작용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경 지도자들은 모든 방문객들에게 자기들의 최대관심사는 북방변경에 배치되어있는 소련 군대라고 주장했으며 외부세계는 이 주장을 대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북방 변경의 우세한 소련 군사력은 중공이 문혁으로 가장 취약했던 60년대 중반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며 만약 소련의 목적이 중공에 군소적 압력을 가하는데 있었다면 세계적으로 고립되고 취약했던 그때야말로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그때 공격해오지 않았다. 따라서 국내적으로 안정이 회복되고 국제적으로 활발한 외교관계를 서둘러 수립하고 있는 70년대에 들어서 소련의군사적 위협이 제1의 관심사라는 중공지도자들의 이야기는 믿기가 힘든 것이다.
중공관리들의 설명은 이렇다.
60년대 초기에는 소련의 하수인인 유소기 일당이 중공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유가 실각한 후는 임표가 하수인 역할을 인계 받았었기 때문에 군소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소련은 중공을 예속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임표마저 실각되자 이제 군소력 이외의 방법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럴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중공 외교정책의 급격한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그 동기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69년 중공이 문혁의 혼란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거기에는 두 가지의 주요 형태발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첫번째는 중공의 제2의 위협인 미군의 「인도차이나」개입이 줄어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닉슨」은 월남전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워 애년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69년에는 「괌·독트린」을 발표하여 「아시아」일대에 대한 미군의 개입을 축소시키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리하여 「인도차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50여만 미군 병력이 중공 본토 자체에 대해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줄어들고 있었다.

<미내의 원자재 확보 부심>
둘째로 일본은 중공이 문혁으로 혼란을 겪던 사이에 이룬 고도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경제력의 긴 손실을 서서히 밖으로 내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60년대 중반부티 일본은 동 「아시아」일대에 자본투자를 시작하여 해외에 합작 또는 독점회사를 설치하고 있었다. 일본은 또 미래의 원자재 확보를 위해 장기거래 협정(「인도네시아」로부터는 석유, 인도로 부터는 석탄,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는 철광)을 맺었으며 한국·대만·「홍콩」·태국·「필리핀」과는 주교역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일, 잠재적 혁명대중유혹>
일본의 소비상품은 「아시아」의 주요도시에서 소비성 문화를 번성시키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의 방대한 농촌인구의 「부르좌」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중공이 미래의 인민해방전선 대장지역으로 손꼽고 있던 지역에 자유경제 체제를 부인시키고 각국 경제에 고도성장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임표는 작년 『인민해방전쟁 만세!』라는 논문에서 혁명적 농촌사회가 「부르좌」적 도시사회를 세계적 규모로 포위한다는 중공의 전략을 개진한 바 있다.
이 전략에 따라 분명 아시아 지역의 「부르좌」적 도시사회에 속하는 일본은 「트랜지스터」·「텔리비젼」·「카메라」·자동차·전기밥솥 등으로 잠재적 혁명대중을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중공이 아직도 「아시아」각국의 대중들을 「반동괴뢰정권」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면 일본이 예증하고 있는 지극히 성공적인 「아시아」형 자본주의의 예는 중공이 내세우는 혁명과 이를 이룩하는데 필요한 희생과 비교하여 위험할 정도로 매력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 다극균형에 협력>
따라서 중공이 아직도 혁명의 순수성에 대해 과거와 같은 집념을 갖고 있다면 일본은 모택동 사상에 대해 소련수정주의와 비견할만한 도전으로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나까」 일본 수상이 북경을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문혁 이후 중공의 신 외교노선은 소련서 계속되는 위협과 일본의 성내 영향력 증대에 다같이 대항하는 반작용으로 풀이될 수 있었다. 중공이 원조·교역·투자 등의 형태로 배제적으로 일본에 대항할 수 없음은 자명하기 때문에 중공의 힘은 정치 및 외교적 무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공은 한편으로는 반일 선전전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닉슨」의 화해 외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북경은 미·중공간의 화해가 일본에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며 일본인에게 새로운 불안감을 안겨다 주리라는 것을 분명히 계산하고 있었다.
미·일간의 특수관계를 해친 「닉슨」·「키신저」 「팀」의 어설픈 외교행각 덕택에 간접적인 도움을 받은 중공은 열성적으로 다극세력 균형의 형성에 협력했다.
「4극 세력 중심」이란 그 개념규정상 일본을 더욱 고립시키고 일본이 지금까지 보호받아 온 핵우산의 근거인 미·일 안보조약에 대해 일본인이 심각한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중공은 또 국내 경제면에서도 극적인 변혁을 기했다. 자력갱생 사상과 구식 장비로 인한 느린 성장률을 포기하고 농공 부문을 현대화하기로 결정했다. 대외 무역량을 늘리고 과거에 비해 훨씬 대규모의 외국 차관을 받아들여 외국 기술과 「플랜트」와 장비를 도입했다. 다시 말해서 중공은 소련으로부터 오는 군소적 위협과 일본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도전에 대처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국력을 배양할 시간여유를 얻는데 역점을 둔 새로운 외교 및 국내정책을 입안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공이 종국에 가서 필연적으로 오게 될 일본과의 역내영향력 경쟁을 위해 준비작업을 하고있다는 추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중공, 외교적 게릴라전 펴>
일본에 정면대결을 하기에는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중공은 외교적 「게릴라」전술을 쓰고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련의 위협을 계속 과장하면서 「아시아」지역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경고하는 중공외교기조의 한 동기였을 것이다.
짧은 시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일·중공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양자간 대결의 필연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즉 중공은 그러한 행동으로써 「아시아」지역에서의 대극균형 형성을 촉진시킴으로써 미국·소련·일본의 상호입장이 그 긴장 아래 약화하는 동안 옆자리에 앉아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은 은근히 미국과 「유럽」의 경제력이 일본이 형성하고 있는 소위 「대공영권」을 잠식하도록 옆에서 충동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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