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3)<제자 정구영>|<제34화>조선변호사회(18)-대구검사국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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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소불수리사건이 있던 이듬해인 21년8월 나는 검사에 임관이 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임지에 가보니 5명의 검사가운데 조선사람은 나 혼자 뿐이고, 판사로는 대구 복심법원에 이우철(83·생존·대구거주)과 이명섭(작고) 양 판사가 있었다.
새로 부임한 검사로서 소관사무에 익히느라고 내 나름대로 정리도 하였고, 고생도 한 결과 약 한달이 지난 뒤에는 사무에 틀이 잡혀서 어느 정도 숨을 돌릴 만 했다.
대구에서 얼마동안 근무하며 보니 당시 지방관청주변엔 뇌물이 상당히 성행했다. 나는 대구가 초임지로 관사가 없는데다가 아는 사람조차 없어서 친지의 소개로 어느 집 사랑채를 빌어 쓰고 있었는데 저녁 때 검사국에서 돌아와 보면 빈방에 인삼보따리·비단 등 값진 물건들이 널려있었다.
그 물건들과 함께 떨구어놓은 명함을 보면 모두 내가 담당한 사건 관계자들이 보낸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대구경찰서 사법주임(형사주임)을 불러 관계자들에게 물건을 돌려주도록 했는데 어떤 때는 몇백원씩의 현금을 넣은 돈 봉투가 놓여있기도 했다.
당시 쌀 한가마에 3원이 못되던 때요, 내 봉급이 1백원이었으니 몇백원이라면 상당한 거금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제공자의 주소·성명과 내가 조사하고 있는 사건의 요지를 대구경찰서 사법주임에게 일러주고 그 제공자를 경찰서로 불러 금품의 다산에 의해 처리토록 지시했다.
즉 경미한 자는 훈계방면하고, 또 다소 중한 자는 2, 3일 동안 구속했다가 그의 부당함을 타이르고 방면하드록 했다. 그 당시 경찰에는 20일에 한하여 유치라는 형식의 구속 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같은 방법으로 처리한 사건이 수십 건에 이르렀고, 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짐에 따라 처음 반년이 지난 뒤부터는 거의 그런 일이 없다시피 됐다.
이 무렵에 대구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고 있던 문석규(의학박사 문종소의 부친이며 앞서 말한 경성 나심 법원판사 문택규와는 형제간) 양대경(전법전조교수) 김의균 한규용 등과 판사로 있던 이우익 이명섭 등과 자주 어울렸다.
조선인 변호사들과 법정에서는 매일같이 다투는 사이지만, 저녁이면 조선인법조인들끼리 고급요정에서부터 싸구려 선술집에 이르기까지 자주 어울렸다.
술값은 변호사들이 2번 내면 재조의 우리 3명이 한번 정도 내는 식으로 했었다.
내가 부임한지 얼마 뒤 대인의 조선인법조인들은 간이법률강습소를 차려 법원서기·형무소간수·변호사사무원 등 20여명을 모아 하루2시간씩 간이한 법률을 가르쳤었다. 비록 그것은 1년 남짓 기간의, 이름 그대로 간이법률강습이었으나 내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 일 중의 하나였다.
일본 통치하에서 일반이 고통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일본경찰의 밀정노릇을 하던 조선 사람의 행패였는데 내가 대구에 있을때 그 한 사건을 겪어 당황했던 적이 있다.
22년 여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구경찰서에는 「마쓰무라」라고 하는 유능한 순사부장이 있었다. 그는 통감부시절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던 50여 세쯤 되는 사람으로 조선말을 유창하게 잘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휘하에 4, 5명의 귀가 빠른 조선인 보조원을 두고 있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일본인 밑의 조선인 밀정을 「창예」라 불렀었다.
나는 대구검사로 지내는 동안 그 휘하밀정들의 작폐가 극심하다는 것을 듣고 있던 중 그 가운데 박가라고 하는 밀정이 어느 피의자가족을 공갈해 8백원을 갈취했다는 고소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조사해본 결과 고소사실이 밝혀져 그를 구속하고 취조를 계속했다.
그랬더니 「마쓰무라」가 즉시 찾아와 『검사전(당시 경찰은 검사를 이렇게 불렀다) 박가는 범죄검거에 공이 많은 자입니다. 제 얼굴을 봐서라도 선처해 주십시오』라며 애원을 했다. 기소유예 처분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인즉 박가는 여러 해 동안 자신의 밑에서 많은 사람을 잡아넣었기 때문에 범죄집단에 널리 이름과 얼굴이 알려졌고, 형무소에라도 들어가면 아무개의 끄나풀이라는 것 때문에 재소자들에게 맞아죽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쓰무라」가 형사로서 유능한 것은 인정을 했지만, 그 밀정들의 폐해는 단연코 교정하여야겠다는 생각에서 그의 청탁을 단호히 거절하고 다른 사건과 같은 기준에 의해 박을 그대로 기소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난 겨울 어느 날의 일이었다. 아침에 검사국에 출근해보니 나의 입회서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병이 났거나 가정에 무슨 사고가 있어 못 나온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다른 서기를 불러 일을 같이했는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나오지를 앓았다.
그 상태가 며칠 계속되었으며 다른 서기들의 말인즉, 그 서기는 모종의 형사사건으로 구속되어 수야중력 차석검사의 조사를 받고있다는 것이었다. <계속> 【정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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