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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파리서 출간된 소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의 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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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솔제니친」은 1945년 자신이 체포되던 당시의 이야기와 그후의 심문, 강제 수용소까지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밤 중 모든 비밀 공작 요원들이 체포활동을 벌이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자신이 다시 살아 돌아올지 또는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해둬야 할지조차 잘 모른다면 그처럼 이상한 일은 또 없을 것이다.
혹은 전 시민의 4분의1이나 체포됐던 「레닌그라드」에서와 같은 대량 검거 선풍이 불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아래층 현관문이 쾅쾅 울릴 때마다, 그리고 층계를 올라오는 발짝 소리마다에 시시각각 얼굴이 창백해지다가도 급기야는 대담하게도 손에 손에 도끼·망치·부지깽이 등 손에 닿는 것은 모조리 움켜쥐고 출입구에 진을 쳤었다면 그 또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또….
내가 체포된 지 열 하루가 지나자 첩보대의 첩자3명이 「모스크바」의 「비엘로 러시안」역으로 나를 끌고 갔다. 그들 중에는 「모스크바」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감옥까지 내가 길을 안내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육군 본부 안에 있는 방첩 부대 영창에서 하루, 전방 사령부내의 방첩 부대 영창에서 사흘을 보냈다.
전방 사령부내 방첩 부대 영창의 악명에 대해서는 이미 감방 동료들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일단 체포된 사람은 결코 풀려날 수 없다 든가 적어도 『10「달러」짜리』, 다시 말해 10년형은 피할 길 없다는 식의 공갈과 협박, 또는 구타가 심문관들에 의해 자행되고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왜 나는 침묵을 지켰나? 나는 왜 영어의 몸이 되기 전 최후의 순간까지 이러한 사실들을 거리의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어째서 자신이 옳은가, 어째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가에 대해 항상 그럴듯한 이유들을 준비해 놓고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건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혹시나 뜻밖의 사태로 그러한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릴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침묵했던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내가 외친다해서 몇 명의 「모스크바」사람이 들어줄 것인가. 2백명, 아니 그 배? 설사 2억명이 들은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당분간 나는 침묵한다.
아마도 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체포됐던 것 같다. 창백했던 「유럽」의 2월, 나는 「발틱」해에 있는 아군의 좁은 참호-우리가 독일군을 포위하고 있던, 아니 그들이 우리를 포위했던가…그 속에서 체포돼 끌려나왔던 것이다.
여단장은 본부로 나를 불러들이더니 내 권총을 내 놓으라 했고 나는 아무런 악의도 없는 것 같아 순순히 응했다. 그러자 구석에 긴장한 표정으로 꼼짝 않고 서있던 정보장교 두 명이 내게로 다가와 내 모자와 견장·장교용 혁대에 붙은 별 표지를 다짜고짜 떼어내고는 대사를 외듯 소리질렀다.
『당신을 체포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뜨겁게 달아오르고 쑤셔대는 데도 내가 지를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뭣 때문에?』라는 말뿐이었다.
정보 장교들에 끌려 출구를 막 나서려는 순간 여단장은 나를 불러 세웠다.
『「솔제니친」! 이리 돌아와.』 나는 몸을 홱 돌려 「스메르쉬」(소련군 방첩부대) 요원들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제1우크라이나 전선」에 친구가 있지!』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금지돼 있어. 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단 말야.』 방첩 부대의 대위와 소령이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학교 때의 친구와 서신 왕래를 한 이유로 체포됐으며 그로 인해 상당한 위험이 앞으로 따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카하르·게오르기예비치·트라프킨」여단장은 내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대위, 자네의 행운을 비네,』
나는 이미 대위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인민의 노출된 적이었다(우리는 누구라도 체포되는 순간부터 완전히 노출된다).
그가 행운을 빌어주다니, 적에게!
그날 밤 「스메르쉬」장교들은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소를 밝혀내려는 희망을 포기했고 내게서 빼앗았던 지도를 다시 정중하게 돌려줬다.
사실 그들은 절대로 그 지도를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육군 본부내의 방첩부대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하는가를 운전병에게 알려주라고 내게 요구했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안내해서 내가 들어갈 영창까지 왔다. 그들은 나를 곧 영창에 가둬버렸다.
감방 안은 한 사람 키 만한 길이로 세 사람이 꼭 붙어 누울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었다. 한 사람이 더 들어오면 앉을 자리도 없을 만큼 협소했다. 그런데 하필 내가 네 번째 사나이라니. 그것도 오밤중에 쑤시고 들어오다니. 그들은 자고 있었고 나는 얼떨떨한 채 앉아 있었다.
아침이 되자 그들은 잠을 쨌다. 하품들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뭣 때문에 들어 왔소?』
『나도 모르겠소. 그 뱀 같은 녀석들이 당신들에겐 이유를 말합디까.』
내방에는 3명의 「탱크」병들이 들어 있었다. 그들의 견장은 흉하게 찢겨있었고 군데군데 무명천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들의 「탱크」부대는 재수 없게도 「스메르쉬」부대 본부가 있는 마을로 「탱크」수리를 위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방금 전투에서 돌아온 참이라 온통 땀에 절어 있었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목욕탕으로 몰려 그곳에서 「허스키」의 두 아가씨가 목욕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아가씨들은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아가씨가 이곳 첩보 부대장의 여자일 줄이야.
그후 내가 겪었던 긴 감옥생활을 돌이켜 보면 나는 자랑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나는 보다 강경하게 버틸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는 기술적으로 적당히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처럼 회상을 하면서도 깊은 회한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은 것은 다행하게도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체포당하게 되는 일이 없었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는 까딱 잘못했으면 그런 일을 저지를 뻔했었다.
「니콜라이·V」와 나는 일선의 장교들이면서도 어린애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다 함께 감옥에 들어갔다.
우리는 전시라 우편 검열을 철저히 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치적 불만을 서로 숨김없이 털어놓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들의 편지내용은 당시의 관념으로 볼 때 충분히 형이 가해질만한 물적 증거가 되고도 남았다.
때문에 나를 담당한 심문관은 골치를 앓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다만 내가 보낸 편지나 내가 받은 편지를 자세히 읽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는 잠을 재우지 않는다 든가 협박을 한다 든가 정도의 방법만을 가끔 사용했을 뿐이다.
장교가 되기 전 나는 반 년 가량을 고달픈 사병으로 지냈다. 하찮은 녀석들에게까지도 무조건 복종을 해야하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굶주림도 참아야했다.
나는 졸병 생활의 비참함을 배워야 했고 살가죽이 터질 듯한 아픔을 기억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를 못했다. 그들이 내 어깨 위에 두 개의 별을 달아주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세 개, 네 개로 늘어나는 동안 나는 안일 속에 묻혀 그 모두를 말끔히 잊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자유를 사랑하는 학창시절의 뜨거운 사랑만은 간직하고 있었다.
형무소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수지」와 한 짝이 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우리는 감방 안에서 함께 이야기했으며 특히 이곳에서의 중요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우리는 쉽사리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그도 내게 많은 말을 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의 인생의 목표를 「러시아」혁명사 연구에 두었다. 그 밖의 내 개인적인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마르크시즘」에 대해 일찍부터 심취해 있었다.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수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져왔었다. 지금 그는 그의 모든 것을 황홀감에 젖어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에스토니아」지방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는 「에스토니아」나 「부르좌」민주주의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해본 일이 없었지만 나는 그가 즐겨 들러주는 20년 동안의 「자유로왔던 시절」을 귀담아 들었다.
나는 「유럽」인들의 체험 중 가장 알짜만 뽑아 만든 「에스토니아」헌법이라든가 1백명으로 구성된 단원제의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지만 나는 점점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되고 좋아하게 되기까지 했다. 소련은 1940년에 「에스토니아」를 공격했었으며 그후 41년, 44년 등 세 차례나 공격했다. 「에스토니아」청년들은 소련군 아니면 독일군에 끌려갔고 개중에는 다행히 숲 속으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처칠」영국 수상이나 「루스벨트」미 대통령도 「에스토니아」의 운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련군들이 「에스토니아」에 입성하자마자 소련의 지배를 벗어나려 기도했던 많은 「에스토니아」지식인들이 꼼짝도 못해보고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 중 15명은 「모스크바」로 끌려가 「루비양카」형무소에 분산 수용됐고 자주 독립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형법 58조 2항의 적용을 받았다.
꿈같은 일이었다. 1963년2월 공산당 조직 부원이던 대령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소련 최고 재판소 예심 회의장에 끌려갔다. 방에는 둥근 기둥들이 서 있었으며 U자형 「테이블」과 오색 창연한 7개의 의자가 있었다. 70명의 군 검찰관이 나를 심문했다.
처음 나는 강제 수용소행을 언도 받았고 그후 다시 영구 추방형을 선고받았지만 내게 형을 선고한 판사가 누군지 한 명도 얼굴을 마주 대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들 모두가 여기 모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는 형편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몇 사람은 명예 제대를 해서 연금을 받게 되기도 했다.
우리들 가운데 몇몇은 「흐루시초프」치하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 중엔 재판관 석을 향해 용감한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
『오늘 당신들은 우리를 재판하고 있지만 내일은 우리가 당신들을 재판할 것이다. 두고 보자』고.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내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줄곧 내 자신을 돌아보고 놀라곤 했다. 그들은 인민이었다. 정말 진정한 인민이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선만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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