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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또 한해가 저문다.
하루해가 저물면 사람들은 잠에 든다. 그러나 제년상의 한 해가 저물때, 사람들은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섣달그믐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는 습속을 같이하고 있다.
낮과 밤이 끝없이 뒤바뀌는 일상속에서는 별로 그것을 의식함이 없이 그저 좇기듯 총총한 시간을 살아오던 사람들도 한해가 저무는 저녁엔 밤을 밝혀 시간의 뒤바뀜을 지켜보려는 것이다.
한해에 적어도 한번쯤이라도 이처럼 시간의 흐름을 의식해 보고 또 시간의 뜻을 음미해 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사람에게 공동되는 세모의 정감이란 바로 다름아닌 이 시간에 대한 감회라고 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의식은 1차적으로는 「변이」에 대한 감회로써 실감된다. 모든 것은 시간속에 존재하고있고, 그렇기 때문에 또 모든 것은 변이함을 숙명으로 하고 있다.
불교가 가르치듯, 이 삼라만상중 목숨이 있는 것이며, 목숨이 없는 것, 또는 자연의 작여며 인공의 조화며를 가릴 것 없이, 무릇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고 가고, 일그스러지는 시간적 존재에 필연지워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제까지 그처럼 단단해 보였던 것이, 오늘은 벌써 뒤틀어져 흔들리고, 오늘 이처럼 터질듯이 차있는 것이, 내일이면 이내 한 모서리가 이지러지는 것은 사계의 성곤며, 인생의 영속할것없이 다같이 조우하는 시간의 무상임에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1973년, 저무는 세막 의시간을 깨물면서 우리는 여느 때와는 또 다른 감회에 사로잡히게 되는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근것은 저무는 이 한해가 유난히도 거센 시간의 물결과 변이의 무상함을 느끼게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세대를 끌어오던, 영원히 끝이없을 것만 같던 하나의 전쟁이 이해의 서두에 끝장이 났다. 월남전의 휴전말이다.
도저히 녹을수 없으려니 싶었던 얼음장도 녹는다. 미·소, 미·중공냉전시대의 종언이 그것이다.
더불어 하늘을 갈이 일수 없다여겼던 원수끼리도 자리를 같이 하게되었다. UN에서의 남북한의 동시대좌.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지난 가을 이래 전세계를 동시적으로 강타한 석유「에너지」파동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문명세계가 자명한 것처럼 전제하고 있던 값싼 「에너지」와 또 그리고 그전제 위에 저축된 산업문화·소비문화등이 근저로부터 뒤흔들리고 있음을 목도케 해주었다.
「에너지」파동의 「쇼크」는 참으로 광역적이며 심층적이다. 근것은 무한 성장에의 허깨비같은 꿈에 부푼 일부국가에 찬물을 끼얹고, 희미해진 강대국과 약소국,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경계선을 번갯불처럼 졸지에 밝혀놓았다.
뿐만아니라 이「에너지」파동은 어떤 종교도 어떤 율법도, 아니 어떤과학의 예측도 설득시키지 못했던 소비절약에의 대혁명을 전지구적인 규모에서 성취시키고 있다. 서울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런던」에서 「뉴요크」·동경에 이르기까지「네온」의 불빛은 희미해지고, 방안의 온기는 낮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어느때보다도 어둡고 추운 겨울속에 1973년의 세막를 지새고 있다. 시간의 호름앞엔 변이하지 않는것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듯이「에너지」위기는 더욱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자원이며 동력이 하나같이 무한한 것이 아님을 실물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에너지」위기는 까마득한 먼 미래의 일로만 생각해오던 성장의 한계, 인류의 위기를 앞질러 우리앞에 지금 계시해준 경고였다.
예년에 없이 춥고 어두운 1973년의 세막의 뜻은 실로 여기에 귀착하는 것인지더 모른다. 그것은 지금까지 당연한것처럼 주어져 있었던 것, 또는 언제나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처럼 보이던 사물까지도 그 존재의 의미를 시간의 흐름속에, 또 변이의 물결속에서 다시 음미하드록 가르쳐 준 교훈이라고 할수도 있다. 그것은 불문에 붙이고 있었던것울 의문에 붙여보도록 근본적인 물음을 재기한 것이기도 하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에 잠을 물리치고 시간의 뒤바뀜을 체감한다는것은 그러나 그것이 흘러가는 시간에의 한갓된 감상에 젖어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지나간 긴 시간을 되돌아 보고 그 뜻을 되씹어 보는것은 앞으로 다가올 더욱 긴 시간을미리 대비하고 그 뜻을 되새겨 보기 위해서다.
우리가 디디고 선 발 밑을 다시뒤져보는 것은 내일을 위한 보다 단단한 밭판을 다지기 위해서이다. 불문에 붙이고 있던 것을 의문에 붙이는 것도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전제를 찾기 위해서이다. 변이를 관조함은 변이의 방향을 인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춥고 어두운 이 겨울을 견디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새봄을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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