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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자네, 소개서 재미있어" 취업 문이 열리는 복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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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5일 오후 2시,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도서관. 방학이지만 대학생들의 취업 준비에 도서관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신문과 방송·인터넷을 통해 삼성그룹의 채용방식 전면 개편안을 전해 들은 학생들은 ‘패닉’에 빠졌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올 상반기에 삼성그룹을 지원할 계획인 이 학교 4학년 이재승(26·독일어과)씨는 “3개월 동안 삼성직무적성평가(SSAT)를 준비했는데 전형이 바뀌어 매우 혼란스럽다”며 “취업준비생 5명과 함께 해온 SSAT 스터디를 그만둬야 하나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과생은 어떤 방식으로 준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비(非)상경 계열 학생들은 하나같이 고민이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그룹이 올 상반기부터 대졸 공채를 수시·정시로 이원화하고, 한 해 20만 명이 넘게 시험을 보는 SSAT 과다 응시와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서류전형을 도입한다고 하자 대학가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취업 시장에서 삼성의 위치는 대학 입시에서 서울대가 차지하는 비중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삼성의 채용 개편은 다른 대기업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 달 사이에 수십 곳을 응시해야 하는 취업준비생 입장에선 삼성뿐만 아니라 현대차·SK·LG·롯데 등 대기업들을 선택지에 놓아야 하기 때문에 눈치작전도 극심해질 전망이다.

 취업 전문가들은 당장 올 상반기 대기업 입사에서 시험에 능한 ‘벼락치기형 인재’보다는 2~3년씩 내실을 쌓은 ‘준비된 인재’들이 유리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서미영 인크루트(취업포털) 상무는 “이제는 미국식 취업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자리 잡게 돼 대기업에 입사하려면 대학 1학년부터 자신이 가고 싶은 직무와 직접 연관된 스펙을 쌓아야만 하게 됐다”며 “유행 좇듯이 1년 해외 연수 다녀오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심정으로 입사 시험을 봤던 학생들은 더 이상 합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성의 서류전형 부활에 대해 서 상무는 “해당 직무와 관련한 공모전 입상 경력, 대학 내 전공 이수, 동아리 활동 등을 얼마나 실감나게 풀어나가느냐가 서류전형 통과의 관건”이라며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이 유리할뿐더러 대학들도 이러한 작문 능력을 키워주는 수업을 늘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취업 준비 학원들이나 컨설팅 업체들은 이번 삼성의 채용 변화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반응이다. 사실 지난해부터 대기업들은 채용 과정에서 토익·학점·어학연수 등의 정량적 평가 요소를 줄이는 한편, 현장에서 평가가 가능한 정성적 평가 요소를 늘려왔다. 현대자동차는 삼성보다 앞서 지난해 입사시험인 HMAT(Hyundai Motor Aptitude Test)에서 30분 동안 1000자가량을 작성하는 역사 논술 문제를 출제했다. 또 인사팀 직원들이 직접 암행어사처럼 새벽 첫 버스를 타는 학생, 도서관에서 밤늦게 공부하는 학생 등을 찾아 그 자리에서 “현대차 입사에 관심이 있느냐”고 제의하기도 했다. 허정욱 현대차 인재채용팀 과장은 “공채 채널만으로는 글로벌 인재 확보에 한계를 느꼈다”며 “올해도 다양한 채널을 통한 채용을 늘리고 공채 비중은 점차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대차만이 아니다. SK도 지난해부터 학벌·학점 등 기본정보를 모두 가린 채, 자기 PR이나 아이디어 발표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숙을 실시한 뒤, 임무 수행 능력에 따라 입사를 결정하는 ‘바이킹 챌린지’ 채용을 도입했다. KT도 ‘달인 채용’이란 이름으로 마케팅(광고)·SW개발·보안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거나 우수한 역량을 보유한 경우 학력·스펙·어학점수에 관계없이 선발했다. 이러한 탈(脫)스펙 현상에 대해 한 취업 컨설턴트는 “이번에 삼성이 자기추천전형이라든지 교수추천제를 도입한 건 지난해 취업준비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현대차·SK 등의 수시 채용 시스템을 뒤따라간 것”이라면서 “정성적 평가 위주의 전형이 대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학생들도 이에 맞춰서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취준생들이 여전히 스펙에 목매는 사이, 기업들은 이미 정량적 요소에서 정성적 요소로 평가 방침을 바꿔왔다는 뜻이다.

 인·적성 평가의 비중이 줄어드는 대신, 인턴십이나 공모전 수상 등 ‘실용 스펙’ 위주의 평가요소는 곳곳에서 강화될 전망이다. 변지성 잡코리아 커뮤니케이션 팀장은 “SSAT나 HMAT를 비롯한 기업 인·적성 평가는 갈수록 비중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일단 인·적성 평가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하면, 그 다음 면접이나 실무 능력 측정 단계에서는 지원자별 인·적성 평가 점수 차이가 미미하게 반영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홍준기 이커리어 대표는 “스펙이 부족하고 경험이 별로 없는 학생들에게 삼성 채용은 한 줄기 희망 같은 존재였는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직무 연관성이 적은 스펙의 비중은 낮추되 직무 관련 자격증이 있다면 가산점을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면접 비중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취업 포털 사람인이 최근 기업 인사 담당자 506명을 대상으로 ‘면접 중 지원자의 당락을 결정하는지’를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셋 중 두 명(64%)이 “결정한다”고 답했다. 임민욱 사람인 팀장은 “해당 회사에서 얼마나 조직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지 관련한 태도나 회사 가치관 등에 대한 높은 이해도 등을 더욱 세세하게 물어보는 게 올해 대기업 대졸 공채의 특징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특히 ‘불합격 결정을 더 많이 한다’는 응답이 49.7%로 ‘합격 결정을 더 많이 한다(28%)’는 의견보다 20%포인트가량 높게 나타났다.

 대학들도 삼성의 채용 변화 방향을 분석하며 앞으로의 대응 방향에 골몰하는 눈치다. 서울 유명 사립대학의 한 취업센터 관계자는 “재학생들이 서류평가를 통과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오늘부터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며 “상반기 공채 시작 전까지 완료해 삼성 계열사를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배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서울대를 비롯한 수도권 대학은 SSAT 등 인·적성 평가 대비 특별과외까지 마련했다. 서울대와 중앙대는 지난해 상하반기 각각 두 차례에 걸쳐 재학생·졸업예정자들을 상대로 SSAT 모의고사를 치렀으며, 한양대의 경우 지난해 여름방학 동안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SSAT 점수를 올리기 위해 2박3일 인·적성 시험 집중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작문 능력 배양이나 인턴십 소개 등에 중점을 둘 계획이다. 중앙대 관계자는 “학생들의 수요에 따라 인·적성 평가뿐만 아니라 에세이나 인턴십, 공모전 등 실용 스펙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채윤경·김영민·조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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